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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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부 帝王 無恥
이상한 所聞(12)

그 이튿날 왕이 승정원에 내린 전교에 간밤에 녹수가 충동질한 것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었다.

<일찌기 성종대왕꼐서 폐비(廢妃)하신 일은 명철하게 깊이 생각해서 하지 않았을까마는 그러나 사단(事端)이 여인의 투기에서 생겼고, 투기하는 일은 비록 요순(堯舜)의 시대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폐비의 일이 이미 20년 전에 있었음에랴. 모자의 사이에는 인정이 절로 그칠 수 없는 것이다. 회묘(懷墓)와 효사묘(孝思廟)에는 비록 별도로 친제를 거행할 수 없다고 대간이 고집하지만 혹시 다른 능(陵)이나 전(殿)에 친제를 올리는 일로 인하여 지나는 길에 이를 거행하는 것은 무방할 듯한데 어떠한가? 그리고 효사묘에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고자 하는데 그 전(奠)을 올리는 의례(儀禮)는 더해도, 아주 지나쳐서는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줄여도 아주 지나쳐서는 아니 될 것이니 사응원으로 하여금 적당하게 갖추도록 하고 내시를 이명하여 그 일을 받들게 하라. 만약 내시에게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불편하면 참봉을 두어서 관장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정승들에게 의논케 하고 승지들도 의논해서 합계(合啓)하라.>

정승과 승지들에게 의논해서 아뢰라고 한 것은 정승들은 이제 더 벼슬이 오를 수 없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고, 고령으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왕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편이고, 승지들도 대개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된 사람이 더 많아서 역시 왕의 뜻을 맞추려 하기 때문이었다.

윤필상을 비롯한 원임 시임 정승들이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한 후 왕에게 올린 합계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폐비 윤씨는 선왕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선왕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여 상제를 갖추지 못하도록 금법을 세우셨으나 전하께 있어서는 생모가 되시므로 임시 방편에 따라 효도를 펴시려는 뜻은 천성지효(天性至孝)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대체로 어머니가 비록 도리를 잃었더라도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마땅히 그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옵니다. 선비를 위하여 이미 묘소를 옮겨 희묘라고 이름하시고 사당을 세워 효사묘라 이름하셨으니, 선비를 추모하여 섬기는 데는 도리가 갖추어졌습니다. 친제 같은 것은 물론 종묘(宗廟)의 제사와 같이 할 수는 없사오나 자문(諮問)하지 않고 거행하실 수 있는 일이오니 묘와 사당에 각각 관원을 두시고, 사당에 조석으로 상식하는 것도 인정과 예절에 맞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승지들이 따로 모여 어명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를 의논하여 합계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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