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배경 ‘기산양식’ 독특한 경지, ‘올해의 미술작가상’등 수상 이어져
칠순 앞뒀지만 최고의 작품 안나와 마라톤 풀코스 완주하며 건강 관리

▲ 기산 정명희 화백이 “내년 70살 기념 전시 때 동시에 시선집도 낼 생각이며 제목은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일곱 번째 아홉수를 곱게 보내는 두 가지’로 정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기산 정명희 화백(69)하면 으레 금강이 따라붙는다. 금강을 주제로 수십 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해온 그에게 어느 순간 금강 작가라는 별칭이 주어졌다.

그가 한때 충북 옥천군 방아실에 둥지를 튼 것도 금강과 연관이 있다. 금강물이 크게 모이는, 일테면 호랑이굴 같은 곳이 바로 대청호변의 방아실이다.개인전을 앞두고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화백을 대전시 중구 선화동 다세대 주택의 옥탑방에서 만났다. 대여섯 평 남짓한 이곳이 그의 화실이다.

수백억 원대의 작품을 기증한 작가의 화실치고는 매우 초라했다. 화실 한 켠에 '뜻을 세우면 이룰 수 있다'는 글자가 새겨진 길다란 명패가 서 있었다.

좌우명으로 삼는 듯 했다. 그러기에 '기산 양식'의 독특한 경지에 도달했는지 모르겠다. 칠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 최고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는 화백의 말에서 여전히 식지 않은 창작열을 읽을 수 있었다.

-정명희 화백하면 먼저 금강이 떠오른다. 화백과 금강은 어떤 관계인가.

"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사람들이 금강과 어떤 관계냐고 물으면 '우리 고장에 있는 강이니 그린다'고 말하곤 했다. 강과 더불어 살면서 금강을 소재로 작업을 해 온지도 벌써 40여 년이 됐다."

-금강 작가라는 별칭이 마음에는 드나.

"마음에 들기도 하지만 솔직히 부담감도 있다. 그래서 강을 많이 찾았다. 세계 문명발상지인 나일강,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황하강 등도 둘러봤다. 강을 알기 위해서다."

-처음부터 금강을 주제로 작업을 한 건가 아니면 중간에 무슨 계기가 있었나.

"사실 초기에는 높은 산, 계곡, 폭포 등 산수화를 그렸다. 선배들과는 다른 변별력 있는 길을 가야 내가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나와는 자별한 운산 조평휘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형님은 산을 그리쇼, 나는 강을 그릴 테니'라고 농담 삼아 입을 연 것이 강을 선택하고 금강을 잡고 그린 계기가 됐다. 금강의 본성, 근원을 생각하다보니 화풍은 산수화 풍경에서 비구상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작품에는 거의 새가 등장한다. 흡사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인데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이나 종교적 관념 같은 것이 있는지.

"그렇다. 어느 날 교회 목사인 아내가 내 그림을 보더니 '여보 요즘 십자가를 그리고 있어요?'라고 묻더라. 이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 새는 십자가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별이라고도 하더라. 보는 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다."

-교편을 잡았다가 작가로 전향했다. 교사생활도 좋을 것 같은데.

"10여 년을 낮에는 교편을 잡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공모전에 그림을 제출하려니 밤을 새고 학교도 무단결근하게 되더라. 어느 날 문득 '내가 화가가 되려고 했지, 선생으로 끝나려고 한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 때는 이때다 싶어 과감히 사표를 냈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결혼식을 올리면 사표를 내지 못할 것 같아 결혼 전에 학교에서 나왔다."

-만일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그냥 학교에 있었다면 힘들지 않고 떳떳하게 잘 살았을 텐데, 뭐한다고 젊은 혈기로 그림을 붙잡아 어렵게 살까하는 생각이 지금도 많이 든다. 화가가 안됐다면 건축가가 됐을 것이다. 예전에 극장과 식당, 집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을 꼽자면.

"역시 경제적인 문제다. 그림을 그리며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아들 학비를 보내줘야 하는데 돈이 없어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지인에게 거절하지 말라며 그림을 사달라고 한 적도 있다.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작품과 자존심을 바꾼 거다. 그 심정이 어떻겠나."

-얼마 전 GIAF(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 올해의 미술작가상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겸재미술상도 받았다.

"나는 상복이 있는 것 같다. 상은 겸재상도 그렇고 올해의 미술작가상도 그렇고 대전에서 받았던 대전문화상도 그렇고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하지만 아직도 배고프다. 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인 것 같다. 물론 상이라는 것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았다.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받았다'는 말이 나와야지 소위 감이 되지 않는 사람이 받으면 말이 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노력한다."

-수십 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면서 몇 차례 그림에 변화가 있었다.

"5년 전 환경을 보호하는 NGO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죽은 새와 물고기 등을 찾아다니며 환경운동을 펼쳤다. 그러다보니 당시 작품은 금강의 환경을 고발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것만 찾다보니 그림이 혐오스러워졌고 나조차 내 그림이 보기도 그리기도 싫어졌다. 그래서 죽은 새와 물고기에 모자이크처리를 시도해봤다. '보이기 싫은 것은 보지말자. 그러면 황폐한 강들을 깨끗하게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내 그림은 훌쩍 바뀌게 된다. 새 한 마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새는 보통 깨끗한 강에만 산다. 그래서 그림에 새를 그려 깨끗한 강을 갈망하는 메시지로 표현했다. 이때부터 금강엔 새가 등장하게 된다."

-작품 하나하나가 자식 같을 텐데 1000여 점을 대전시교육청에 기부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수백억 원대(감정가 177억 원) 가치로 알고 있다. 기부계획은 언제 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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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그림들로 가득차면서 발 디딜 틈이 없게 됐다. 그래서 이 그림들을 한 곳에 기부하던지, 팔아서 가족들이 변변한 삶을 누리게 하면 어떨까 여러 가지 모색을 하고 실제로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김신호 대전시교육감이 기증을 제의해왔다. 전시했던 작품들부터 낙관, 스케치까지 1396점을 몽땅 기부했다. 주려면 이렇게 주는 것이라는 본보기도 보이고 싶었다."

-어떤 시기의 작품이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보는가.

"인정받는 작가들은 보통 60대에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내놓았다고 들었다. 내 경우에는 70살은 넘어야 할 것 같다. 아직 최고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좋은 작품을 잉태하기위해 고민하고 노력한다."

-대전예총 회장을 역임했는데 도중에 물러났다.

"아픈 기억이다. 애초에는 미협 회장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같은 식구끼리 싸우기 싫어 고사했다. 주위에서 대전예총 회장을 추천했고 이를 받아들여 무투표로 당선됐다. 그러나 도중에 그만둬야 했다. 나는 대전예총 회장이 된다면 예술인들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창작활동을 찾고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간섭과 참견으로 일이 뜻대로 되지 못했다. 결국은 고심하다 기자회견을 열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예총회장을 도중에 내려놓은 것이 두고두고 임기를 못 마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지만 그때 결정을 잘 내렸다는 사람도 있어 위안을 삼는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건강해야 작품 활동도 왕성하게 할 수 있다. 화백께서는 마라톤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풀코스 완주도 많이 한 걸로 알고 있는데.

"풀코스 완주를 17번 했다. 회갑기념으로 완주나 해볼까 하고 울트라 100㎞에 도전하기도 했다. 원래는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웃으며) 아버지로부터 각종 성인병 종합선물세트를 물려받았다.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달리기와 인연을 맺었다. 돈도 들지 않고 참 좋다."

-지역의 많은 젊은 작가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내고 있다. 작품 활동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조언 한 말씀 해준다면.

"나는 집에 '뜻을 세우면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을 가훈처럼 써놓고 자식들에게 매일 읽도록 했다. 큰소리로 소리 지르면서 읽게 했다. 왜냐하면 꿈이 있고 자기가 갈 방향이 확실한 사람은 방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래가 결정된 사람은 사회적 고립도 안 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집념할 수 있다. 과정이 성공이지 성공이 다가 아니다. 후배와 제자들이 성공이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자기가 계획한 것을 달성해가는 과정이 성공이라고 일러준다."

-곧 전시회가 열린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던데.

"나는 개인전을 열 때 모았던 작품으로 전시를 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매번 개인전을 위해 전시장을 고르고 벽면에 맞도록 작품의 크기와 배치를 계획한 후 새로운 작품에 몰두한다. 모은 작품으로 전시를 하면 회고성은 남지만 작가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내보일 수 있는 응축된 힘은 모자란다. 이번 전시 제목은 '금강-예순아홉 잔의 물'이라고 정했다. 전시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5월 9일부터 15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기까지는 참 고민이 많았다. 작품을 모두 기증하고 그해 겨울을 넘어서면서까지 붓을 못 잡고 쩔쩔맸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중 우연히 교육방송을 보다 힌트를 얻었다. 인수분해처럼 개울물이, 폭포가, 드러난 바위가, 흐르는 물이 흩어진 새들이 본령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결과 새를 매치시키는 작품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곤 화판에 정신없이 작업을 해냈다."

-저술활동도 열심히 했다. 10여 권 이상 책을 펴냈으니 대단하다.

"저술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마흔 살로 거슬러 가야한다. 당시 붓을 놓자마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마흔 살까지는 담배를 물고 있지 않는 사진이 없을 정도였으니. 담배를 끊으니 무척 여유로워졌다. 그래서 붙잡은 것이 책이었다. 다시 고등학생처럼 책을 읽었다. 붓을 놓으면 쓰고 생각하고 그림이 마르면 또 쓰고 생각하고 이렇게 반복하다보니 책이 나오게 됐다. 요즘에도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내년 70살 기념 전시를 할 때 동시에 시선집도 낼 생각이다. 제목은 아직 정해지진 않았지만 '일곱 번째 아홉수를 곱게 보내는 두 가지'라고 정하고 싶다. 두 가지는 '믿음'과 '봉사'를 뜻한다."

-앞으로 희망이나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역 예술인들을 위한 예술원이나 학술원이 건립됐으면 한다. 거기서 창작, 저술활동을 지원해주면 지역문화도 덩달아 발전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대양 육대주를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세상에 태어나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이다. 작품 구상과도 연관이 있다. 삶이 작품이니깐. 그림은 죽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논설실장> 정리=박주미 기자 jju1011@cctoday.co.kr

프로필

△1945년 홍성 출생 △홍익대, 중앙대 미술대학원 수학 △대전예총 지회장 역임 △대전·충남 미술대전 초대작가, 운영·심사위원 역임 △안견미술상, 대전시 문화상, GIAF 올해의 미술작가상 등 수상 △작품 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 대영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저서 : 화문집 '하늘을 나르는 물고기', '백두산에서 히말라야까지', 시집 '하늘그림자', '아침이 숲을 깨운다', '색 쓰는 남자', 시선집 '옥상 위에 작은 원두막', '샤워' 등 △2011년 대전시교육청 1396점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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