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전 우연히 고향임 명창 만나면서 입문, 소리에 푹 빠져 골프도 담배도 끊어
하루 종일 얼굴 붓도록 독하게 연습 … 가족의 응원이 내겐 가장 큰 힘이 돼

판소리 불모지 대전에서 국악발전에 헌신하고 있는 소리꾼이 있다. 35년간 금융계에 종사하다 퇴직 후 인생 제2막을 살고 있는 정왕(玎旺) 손영준 선생(62·전 수협 충청지역본부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퇴직 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판소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곧장 판소리의 고장 전주에 내려가 아예 살다시피 했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서 목표를 두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요.”

최고의 선생을 만나서 열심히 노력하고 여기에 타고난 끼를 보태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선생을 찾아갔고 죽기 살기로 매진했다. 좋아하던 골프와 담배를 딱 끊고 구도자의 길을 걷다시피 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소리를 질러 댈 때는 내 입이 내 입이 아닌 것 같고 얼굴이 뚱뚱 붓지만 독하게 연습했지요.” 일반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것도 늦깎이에 판소리계에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즘 그는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앞두고 준비에 여념이 없다. 소리를 통한 지역사회 봉사와 후진 양성에도 혼신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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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금융인으로 지내다 국악인으로 변신했다. 금융인과 국악인 중 어떤 명칭이 마음에 드는지.

“지금 현재는 국악인이 마음에 든다.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간다고 하는데 요즘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아상을 발견 못하거나 퇴직 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난 10년 전 수협본부장으로 임할 때 우연찮게 자기 계발서를 읽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늦었지만 꼭 찾아보겠다고.”

-판소리를 하기 전과 후에 생활습관이라든가 뭔가 달라진 것이 있나.

“분명히 있다. 17년간 치던 골프를 끊었고 담배도 끊었다. 소리를 하기 위해서는 목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는 폭탄주도 자주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구도자의 삶처럼. 판소리에 폭 빠지다보니 너무 좋아 그렇게 살게 됐다.”

-판소리를 처음 접한 건 언제인가.

“8년 전 우연찮게 고향임 명창을 만나면서다. 당시 고 명창이 정기발표회를 가졌는데 그때 몇 번 찬조로 도와주게 됐다. 그 후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됐고 어느 순간 아, 이제부터는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돈에 팔촌이라든가 집안에 소리꾼이 있었나.

“집에 소리꾼은 없고 아버지가 노래를 참 잘했다. 프로는 아니지만 동네에서 파전 한 점을 먹고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면 구경꾼들이 몰릴 정도였다. 우리 형제가 모두 6명인데 그중에 내가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다.”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다. 오히려 가족들의 응원 덕분에 퇴직 후 판소리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예술인들은 타고난 재주나 끼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어느 쪽인가.

“타고난 끼가 좀 많은 거 같다. 흥이라고들 하는데 흥이 많다.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운동하고 춤추고 놀고 그게 좋았다.”

-60이 다 돼서 판소리에 입문했는데 좀 더 일찍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었나.

“그런 생각은 안 든다. 왜냐하면 평직원부터 시작해 본부장에 이르기까지 직장생활의 목표도 달성했다. 오히려 지금 제2의 인생에서 색다른 일을 만났다는 사실이 더 기쁘다. 제1의 인생과 2의 인생이 있는데 2의 인생은 1의 인생과 다른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어른들이 그러더라.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한 직업을 가지는 것보다 두 번 세 번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늦게 배웠다고 해서 후회는 없다. 80이 돼서도 판소리를 할 것이다.”

-판소리를 하려면 힘이 많이 들어갈 텐데, 혹시 힘이 달리지는 않는가.

“인간의 목은 세월을 비껴가는 것 같다. 공부를 위해 수십 번 산을 올랐다. 한 시간쯤 산을 올라가면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숨이 차오를 때 노래를 불러야 그때부터 소리가 나온다. 전주에 계신 선생님은 78세인데 지금도 목이 환상적이다.”

-수상경력이 화려한데, 얼마 전 여수진남전국국악대회에서 판소리 명창부 대상(국회의장상)을 수상했다. 어떤 대회인가.

“14년 전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 3개 시·군이 통합을 했다. 그때 통합 기념으로 만든 대회가 여수진남전국국악대회이다. 이 대회에서 전국의 유명한 소리꾼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 대회에서 흥보가 중 매품팔러가는 대목과 박타는 대목을 애절하게 뽑아냈다. 이 대목을 좋아하는가.

“이 대목은 남자가 불러야 맛이 나는 소리이다. 더구나 나는 남자고 힘이 있고 노래 자체도 나에게 어울리고 해서 선택했다.”

-판소리는 계보에 따라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나뉘어 서로 특성을 달리하고 있다. 굳이 전공이라고 하면 어느 쪽인가.

“동초제 쪽이다. 예전에 판소리는 구전, 전승음악이라고 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다보니 뜻도 모르고 부르는 노래가 많았다. 노래를 하면서도 무슨 뜻이지 모르고 선생도 이를 모르고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판소리의 거목 동초 김연수 선생이 이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판소리 중에서도 동초제가 가장 유명하다. 대통령상을 탄 사람만 수십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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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 금융인으로 지내다 국악인으로 변신한 정왕 손영준 선생이 소리를 위해 17년간 치던 골프도 담배도 끊었다며 지난 소회를 전하고 있다. 여수진남전국국악대회 등에서 큰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그는 명창이라는 칭호를 못내 부끄러워 했지만, 박동진 판소리 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받을 것이라며 도전하는 즐거움에 큰 열의를 보였다. 정재훈 기자 jprime@cctoday.co.kr

-단기간 내에 여러 상을 수상했는데 이렇게 성과를 얻으려면 남다른 노력을 했을 것 같다.

“노력은 중요하다. 예술로 크게 되려면 노력이 필수적이다. 또 노력도 노력이지만 스승을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예향의 고장 전주를 내집 드나들 듯 다녔다. 이일주 동초제 판소리 이사장, 송재영 전북도립창극단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시간 나는 대로 정성을 쏟으며 판소리를 익혔다.”

-가장 존경하는 소리꾼을 꼽자면.

“현재 나의 스승이자 전북도립창극단장인 송재영 선생님이다.”

-영화 ‘서편제’를 보면 득음을 하기위해 갖은 고생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똥물을 마셨다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그러한가.

“실제로 똥물을 많이들 마셨다고 들었다. 소리를 지르면 어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얼굴과 손이 뚱뚱 붓는다. 나는 소리통이 오면 반신욕도 하다가 한의원에서 침도 맞았다. 옛날에는 그런 처방이 없었으니 약 대신 똥물을 먹은 것 같다.”

-얼마정도 연습을 하니 소리가 좀 보이던가.

“5년 정도 하니깐 되더라. 10년이 채 안됐지만 진짜 열심히 했다. 퇴직하고 3년 6개월 동안은 하루 종일 소리만 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조금 빨라진 것 같다.”

-목소리가 좀 허스키한데 원래 목소리가 그런가.

“아니다. 창을 하면서 이렇게 변했다. 매일 소리를 질러대면 목소리가 변한다. 어느 순간 이렇게 변하더라.”

-소리꾼에게는 명창이란 칭호를 받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다. 명창이란 이름은 누가 붙여주는 건가.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아서 명창은 아니다. 여러 사람한테 공감을 받아야 명창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돼야 명창이다.”(자신은 아직 명창이 아니라며 겸손해 했다.)

-판소리가 현대음악에 밀려 홀대를 받고 있다.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국악의 비중이 엄청 초라하다고 들었다.

“판소리는 한동안 명맥이 끊겼다가 1970년도에 다시 살아났다. 지금은 현대 음악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많이 밀려나게 됐다. 특히 언론에서 다뤄주는 비중이 적어 아쉽다. 방송이 젊은 사람들이 노래하는 상업주의로 흘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국악을 좀 더 많이 취급하고 널리 보급했으면 한다.”

-판이 깔려야 소리를 할 수 있는 법인데 무대는 많이 있나.

“복지관이나 경로당에서 소리를 들려준다. 그런 곳이 판이다. 전주에는 정기행사나 식전공연, 기관 자치단체 행사할 때 예술단체들이 뛴다고 한다. 대전은 판이 많지가 않다. 자치단체나 기관들이 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무대에 설 때 젊은 층들의 반응은 살펴봤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판소리를 등한시한다. 하지만 정작 앞에서 들려주면 좋아하는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 반응을 보면 구경도 하고 박수도 쳐준다. 특히 휴양림 같은 곳에 초청을 받아서 무대에 서보면 가족단위 관객들이 좋아한다. 소리가 서정적이고 내용도 좋아 호응이 좋은 것 같다.”

-여담이지만 판소리가 매우 길어서 외우다가 까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주 유명한 명창도 가끔 잊는다고 한다. 멍하니 서있다 내려오는 경우도 보았다. 이건 누구나 할 것 없다. 그래서 실수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다. 반복 수련만이 해답이다. 그래서 보통 공연은 15분 이내로 한다.”

-판소리는 숙성된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언제 목소리가 가장 듣기 좋고 좋은 소리가 나오나.

“요즘엔 소리를 어릴 때부터 배운다. 대학교에서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 판소리는 40정도는 돼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온다. 그 때 성량이 좋기 때문이다. 판소리 즉 성음이라는 건 세월의 맛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도 누구나 판소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리를 배우려는 후배들한테 당부의 말이나 조언을 해준다면.

“판소리는 즐겨야 된다. 내가 뭔가 돼야겠다고 하면 못한다. 즐긴다 생각하고 끈기를 가지고 덤비면 된다. 또 한 가지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안가는 길을 걷고 열심히 하다보면 남들이 못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할 수 있을 때까지 소리를 하고 싶고 많은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하다보면 명창도 되지 않겠나. 대통령상과 박동진 판소리 대회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

<논설실장> 박주미 기자 jju1011@cctoday.co.kr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원리 출생 △수협중앙회 35년 근무(충청지역본부장, 본점영업부장, 서울 서초동지점장 역임) △송재영 명창(전북도립창극단장) 흥보가 사사 △대전 동구문화원 부원장 겸 대청예술봉사단장 △한국한문교사대전연수원 부설 정왕판소리연구원 원장 △비가비 국악연주회 회장 △(사)동초제 판소리보존회 이사 △세종시 예총·국악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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