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한이 만난 사람-조임환 흑백사진가]
포토샵 작업사진 깊은 맛 안나와
촬영 현상 프린트등 전과정 거쳐 원하는 색깔 찾는 흑백사진 묘미

대전시 중구 선화동에 위치한 조임환 흑백사진연구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현상액 냄새가 확 밀려왔다. 그렇다. 이 연구소의 암실에서 조임환 흑백사진가(75)는 손수 사진을 인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디지털시대에 그는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암실에는 무려 30년을 넘게 사용한 확대기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요즘 암실작업을 하는 작가는 손을 꼽을 정도다.

그만큼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간다. 그도 처음부터 흑백사진을 한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일본인 스승의 흑백사진 작품을 접하는 순간 그 오묘한 색깔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후 40여년을 오로지 흑백사진과 함께 해왔다. "촬영에서 현상, 프린트에 이르는 전 과정을 제 손으로 직접 해야 저만의 색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내면의 감성으로 작품을 만드는 거지요." 그는 작품 활동을 새로운 정신적 산물을 토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남이 한 것은 절대 따라하지 않는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줄 모르는 어쩌면 고집불통이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카메라를 메고 전국을 누비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걸어야하기 때문에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사진 속에는 세월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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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투데이 사진마당에 게재된 작품들을 모아 12~17일 대전시청 전시실에서 전시회를 여는 조임환씨는 “세월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는 인물사진에 관심이 많다”고 말하고 있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평생 흑백사진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뭔가.

"수없이 해온 언론 인터뷰 중 이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처음부터 흑백사진 작업을 해온 것은 아니다. 나도 처음에는 컬러사진을 찍었다. 지난 1984년 경 충남도가 개최한 사진전에 작품을 출품 입선해 당시 충남도지사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그 후 흑백사진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하고 있다."

-흑백사진의 묘미는.

"흑백사진은 촬영과 현상, 프린트 등의 과정을 거쳐야만 내가 원하는 색깔을 찾을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한 뒤 포토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토샵으로 작업해놓은 사진들을 보면 하나같이 깊은 맛이 안 나온다. 흑백사진에서만 내 색깔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게 내가 흑백사진을 다루고 있는 이유다. 나는 아직도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사진을 배웠다는데, 처음 사진을 접하게 된 계기는.

"맘에 들고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선 많이 걸어야만 한다. 젊었을 때 허리디스크를 앓아 심하게 고생을 했는데 그 당시 한의사가 많이 걸어야 병이 낫는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 때부터 병을 낫기 위해 무작정 걸었고 우연히 대전문화원 앞을 지나다 사진전시를 보게 됐다. 그 때부터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스승의 흑백사진을 처음 접하는 순간 오묘한 색깔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스승님에게 간곡히 부탁해 전문적으로 배우게 됐다. 스승님이 일본인이다 보니 언어소통이 안돼서 사진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워 스승님과의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도록 노력했다."

-당시 카메라는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웠을 텐데. 값도 꽤 비싸고.

"중학교를 다닐 때 조카의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지만 카메라가 없었다. 그 당시 카메라는 사진관에만 있었는데 사진사에게 카메라를 빌려달라고 했더니 일주일간 사진관 청소를 하면 빌려준다고 했다. 약속한 일주일이 지난 뒤 카메라를 빌릴 수 있었고 그 카메라로 조카의 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카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 때 돌도 되지 않은 조카가 벌써 50이 넘었다. 이후 32살 때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했다."

-특히 인물을 중심으로 사진 작업을 하는 걸로 유명한데, 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인물사진만 하는 건 아닌데 인물사진에 관심을 많이 갖는 건 사실이다. 사람 속에서 세월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역사가 묻어 있다. 그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사진 위주로 작업을 한다."

-'이농지대' '차창' '마라도'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

"이농지대는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주변에서 6년간 촬영한 사진들이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느꼈다. 2002년 작업한 ‘차창’은 충주대로 강의를 나갈 때 수년 동안 열차 창문에서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다. 또 ‘마라도’란 작품은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지난 2000년 작품구상이 안돼서 혼자 울적해 있을 때 마라도란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활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라도에 두 번 갔다 와서는 개인전을 열게 됐다. 지금도 마라도는 종종 다녀오곤 한다. 이런 작품들을 다시 회상하면 그 때 당시의 추억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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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기 위해 여러 곳을 다녔는데 가장 인상적인 곳을 꼽자면. 혹시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추천해줄 만한 장소가 있다면.

"현재까지 작업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순간은 지난 198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진행된 이산가족 찾기 촬영 장면이다. 수십 년 만에 만난 가족들이 서로 안고 우는 모습들은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 다음을 꼽자면 마라도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상적인 곳은 개인적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자신의 심상 표현을 하기 위한 곳이 가장 좋은 장소다. 그래서 어느 특정한 곳을 추천해주기는 좀 그렇다."

-지난해 대한민국 사진대전 운영위원장을 맡은것으로 알고 있다.

"운영위원장은 심사위원을 선별하고 대회의 원만한 운영을 해야 할 권한, 책임이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윤리위원에서 어떤 사람을 운영위원장으로 선정할지 회의를 했는데 만장일치로 내가 뽑혔다고 들었다."

-요즘도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작가들이 있나.

"디지털카메라가 발달한 요즘 아무래도 흑백사진을 하는 작가들을 만나기 힘들다. 현상 인화와 같은 번거롭고 힘든 작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후진양성은 어떻게 하고 있나. 혹시 대를 잇겠다는 자녀는 없나.

"몇 년 전까지 흑백사진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거의 떠나갔다. 흑백사진의 맥을 이어야하는 데 열정을 가진 사람이 없어 끊어질 위기다. 아버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가족 중에는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내가 집에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고 가산만 축냈다."(이 말을 하는 순간 눈가에 이슬이 맺는 듯 했다. 자기 대에서 흑백사진의 맥이 끊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충청투데이 사진마당 출품사진가 전시회가 있는데.

"지난 1년간 충청투데이 '조임환과 함께 하는 사진마당'에 게재된 내 사진들과 후배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대전시청 2층 전시장에서 오는 12~17일까지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이번 전시회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만큼 훌륭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암실작업을 하나.

"물론이다. 암실작업만 40년째 해오고 있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어렵다. 내 큰아들이 절대적인 후원자다.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집안을 내가 다 말아먹었다.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느라고 전답도 많이 팔았다. 지금도 아들이 만류하고 있는 상태지만 흑백사진은 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내려놓기는 힘들다."

-작품들이 모두 자식처럼 소중하겠지만 그 중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자면.

"1980년 촬영한 대청댐이란 작품이다. 노인이 농사를 짓는 모습을 앵글에 담았다. 이 사진을 찍고 일본인 스승님께 보여드렸는데 선생님께서 극찬을 하시며 그 자리에 가보자고 했다. 선생님을 모시고 간 그 날도 사진 속에 허리가 굽은 그 노인은 같은 자리에서 파를 심고 있었다. 스승님도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으셨고 스승님은 그 사진을 팔아 괜찮은 수익을 올렸다고 들었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들려 달라.

"수십 년 전 우연히 포항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게 됐다. 그 장소는 군사지역으로 민간인의 통제를 위한 철조망이 쳐 있었다. 배경사진을 딱 2컷 찍었는데 철조망에 걸려 좋은 배경이 안 나오더라. 아무도 몰래 철조망을 넘어 1컷을 찍는 순간 순찰중인 군인에게 걸려 끌려가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예전에 집 근처에 살던 청년이 그 부대의 장교로 근무하고 있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뭔지 다시 생각게 하는 계기가 됐다."

-사진을 찍다 봉변을 당하지는 않나.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만 작가는 특히 예의를 갖춰야 한다. 사진을 찍을 때는 반드시 촬영을 하겠다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몰래 사진을 찍으려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작가이기 전에 예의범절부터 지키라고 말한다. 예의를 지키는데 왜 봉변을 당하겠는가."

-작가 생활을 하면서 서운하거나 아쉬운 점은.

"대전예술의전당에서 그림 등의 전시는 가능하지만 사진전시는 할 수 없다는 점이 마음이 아팠다. 사진이 이렇게 소외돼서야 하겠는가."

-흑백사진이 디지털시대에도 영원하겠나.

"사진은 170년 전에 등장했다. 사진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화가들의 세상은 다 끝났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인화지와 필름이 안 나온다면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써는 영원하리라 본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다면.

"대전 동구 대동 138번지가 내 본적이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그래도 여기서 68년 동안 살았으니 생을 다하는 날까지 대전에서 살겠다. 그리고 내 인생의 전부로 여기고 찍어온 사진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작품전을 열고 싶다. 특히 1983년 여름,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사건인 '이산가족 찾기' 당시 찍은 사진을 보유하고 있다. 만 30년 되는 내년에 그 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는 내 작품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기증할 것이다."

<논설실장> 정리=이호창 기자 hclee@cctoday.co.kr?

프·로·필

△1938년 일본 동경 후카가와 태생 △1945년 12월 대전 이주 △1959년 대전상고 졸업(4회) △1992년 대한민국사진대전 초대작가 △2004년 대한민국사진대전 심사위원 △2005년 한국흑백사진페스티발 대회장 △2011년 대한민국사진대전 운영위원장 역임 △2011년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 사진부문 대상 수상 △1996년~2007년까지 대전보건대학, 충주대학교, 목원대학교 출강 △현재까지 사진 개인전 5회, 그룹전 100여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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