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으로 인생역전 '법조계 성실맨'
이런 '의좋은 형제'가 실존했고, 의좋은 형제의 무대적 배경이 예산이라는 것은 충청도에서도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의좋은 형제들의 마음씨만큼 인심이 훌륭한 예산에 고향으로 둔 김진섭 변호사는 24년간 군에서 법무관으로 활동을 하며, 예산의 풋풋한 인심을 간직해 온 율사다.
어려운 가운데 형제간의 따뜻한 우애를 보여준 고장 출신답게 김 변호사는 과거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이를 잘 이겨내고 나름대로 목적과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아온 충청인이다.
예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서울과 대전 등 대도시로 유학을 가지 못한 김 변호사는 예산농고의 후신인 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 토목과에 입학했다.
지난 78년 군법무관에 합격한 후 현재까지 걷고 있는 법률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과연 법률인이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인생의 방향으로 청년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백승탁 전 충남도교육감의 일가이자 담당 교수였던 백주현 교수의 권유로 인해 법학도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백 교수는 김 변호사에게 서울에 있는 대학의 편입을 권유했고, 특히 법학을 전공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김 변호사를 설득시켰던 것이다.
결국 김 변호사는 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 5학년 시절(당시는 5년제) 단국대 법대에 편입했고, 탄력을 받아 사법시험에 도전키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율사의 인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군법무관 3회째인 지난 78년 김 변호사는 어렵게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사법고시 등을 준비한 지 3년 만에 얻은 결과다.
당시 군법무관 시험은 5년마다 한번씩 있었기 때문에 경쟁률은 물론 경기고와 서울대 출신 등 알아주는 학교 출신들이 대거 지망했다고 한다.
김 변호사가 합격했을 당시에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 18명에 이를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다. 합격한 후 한번은 경기고 출신이 "어느 고등학교 출신이냐"고 묻기에 "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 출신"이라고 했더니 "그런 학교도 있냐"고 농담을 건넸을 정도로 치열한 과정이었다고 김 변호사는 기억했다.
한 분야에서 20년 넘게 생활을 해 왔으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겠고, 얼마나 많은 추억담이 있을까.
김 변호사는 지난 89년 미국 육군법무관대학원에서 석사받은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미국 독립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완성한 대통령으로 유명한 제퍼슨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버지니아주에 있는 미국 육군법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것에 대해 김 변호사로서는 매우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과정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 중에 많은 공부를 해야 했고, 그만큼의 공부를 하려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김 변호사는 "당시에 언어 문제를 비롯해 많은 학습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1년간의 생활은 나에게 석사학위를 가져다줌과 동시에 내 머리도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고 고생스럽지만 보람되었던 1년간의 미국 생활을 회고했다.
결국 미국에서의 1년간의 고생은 김 변호사를 한·미연합사 법무실장으로까지 오르게 하는 영광을 가져다 주었고, 지금도 대학원 시절 미국에서 친분을 쌓아온 외국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변호사로서 국제적인 감각까지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가지 지난 83년 고등군법원 판사로 재직하고 있던 김 변호사에게 아주 골치 아픈 사건이 배정되었다.
1심에서 강간과 살인으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은 사건을 김 변호사가 주심으로 담당하게 되었는데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잡다한 증거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김 변호사는 판결에 앞서 형사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숙독하고, 결정적으로 강간과 살해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내세워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에 대해 "그 피의자가 정말로 살해를 했을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가 불충분했고, 또한 갓 입대한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고 판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구나 자신만이 존경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김 변호사도 예외는 아닌데 그는 자신의 한 친구를 존경한다고 했다. 다름 아닌 예산 광시중에서 국어를 담당하고 있는 이복현 교사이다.
김 변호사가 예산에 가면 꼭 막걸리라도 한 잔한다는 절친한 관계인 이 교사는 예산의 대흥현 임존성 밑에 있던 옹주태실(옹주들의 태를 묻은 곳)을 발견해 보수를 하는 등 고향의 역사를 보전하고, 이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이것이 정말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럽게 느껴진다고 한다.?
?김진섭 변호사는… ▲1947년 예산 출생 ▲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 ▲단국대 법학과 및 석·박사 ▲1978년 제3회 군법무관 임용고시 합격 ▲1979년 사법연수원 법무3기 수료 ▲1983년 육군 고등군사법원 군판사 ▲1985년 법무연수원 수료 ▲미국 육군법무관대학원 수료 ▲1990년 한미연합사령부 법무실장 ▲1991년 육군 고등검찰본부 ▲1992년 합동참모본부 법무관실 ▲1993년 국방부 검찰관 ▲1995년 USPACOM Legal Conference 한국군 대표 ▲1995년 육군 제3사령부 법무참모 ▲2002년 변호사 개업(서울) ▲변호사김진섭법률사무소 변호사(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