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은행(1) 창립 전후

▲ 대전시 중동 92-2번지에서 창립된 충청은행 모습
지방은행으로서의 태생적 한계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금융기관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혜택까지.

30여년이 넘는 기간에 충청은행은 호황과 쇠퇴를 반복하는 지역경제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숱한 난관을 극복하며 창립돼 힘든 시기를 거쳐 끝없이 뻗어 갈 것만 같았던 호시절도 경험했던 충청은행이 끝내는 퇴출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명멸해가기까지 그 지나간 비사를 짚어 본다.? /편집자

▲ 대전시 금고 업무를 담당했던 충청은행 시청지점.
지난 68년 4월 22일 오전 8시경 당시 대전 최고의 번화가였던 중동의 4층 건물에서 충청은행 개점식 행사가 열렸다.

개점식에는 민영훈 재무부 차관과 김성환 한국은행 은행감독원장, 홍용희 한국은행 부총재, 김윤환 충남지사 등 정부 관계자 및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건물 입구에는 '충남도민의 금고'와 '이 고장을 위한 은행'이란 슬로건이 담긴 입간판이 세워졌고, 수많은 축하 화환이 건물 외벽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이처럼 성황을 이룬 개업식에서 48명의 임직원을 대표해 김운태(전 국민은행 상무이사) 초대 은행장은 미리 준비해 둔 식사(式辭)를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처음 출발하는 충청은행이 지방의 금고 역할을 착실히 이행하는 한편, 나아가 금융의 대중화와 경영의 합리화를 통해 지방 산업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겠습니다."

김 은행장이 인사말을 하는 동안 충청은행의 창립 과정을 주도했던 이웅렬(중도산업㈜ 사장·작고)씨를 비롯한 창립발기인 등 주주들은 은행이 문을 열기까지 1년여가 넘는 기간에 벌어진 순탄치 않았던 여정을 떠 올리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

지방은행으로서 충청은행 탄생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된 첫 해인 1967년 1월 17일 박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지역자본을 집대성해 지역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 동원을 위해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키 위한 투자재원 조달과 개발 과정에서 불거진 지역간 불균형을 해소키 위한 대안으로 '지방은행 설립'이란 카드를 들고 나온 것.

이에 따라 한국은행 은행감독원 내에 '지방은행 설립 지도위원회'가 설치돼 정부 당국에서 지방은행 설립을 적극 지원하고, 부산과 대구 등 각 지방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은행 설립 추진이 탄력을 받게 된다.

같은 해 2월부터 지역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지방은행 설립을 추진했던 대구에서는 3월 24일에 대구은행 설립 내인가를 받았고, 4월 6일에는 부산은행도 내인가를 얻는 등 전국적으로 지방은행 설립 추진이 활기를 띠게 됐다.

이처럼 타 지역의 지방은행 설립 추진에 자극을 받은 대전·충정지역에서도 이웅렬씨를 중심으로 이석건 한국은행 대전지점장의 협조 속에 지역 상공인 및 경제인 30여명이 모여 '대전은행 설립 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이후 3월 25일 제1차 발기인총회가 열리고, 4월 24일 금융통화 운영위원회에 발기인 25명의 명의로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해 같은 달 29일 설립 내인가를 받는 등 순조로운 창립 과정을 밟아 나간다.

은행 명칭도 당초 '대전은행'으로 신청했지만 관계 당국에서 충청지역 전체를 영업 구역으로 하는 만큼 '충청은행'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충청은행'으로 명칭이 확정됐다.

이와 같이 순탄하게만 진행되던 창립 작업은 주식청약과 주금납입 등 실질적인 은행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난관을 겪게 된다.

지방은행 설립의 필요성에는 공감을 하지만 당시의 경제적인 여건과 지역 상황을 고려할 때 투자에 따른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그 당시 지역경제 상황은 열악해 1966년도 대전의 어음부도율은 0.91%로 전국 최고를 기록했고, 충남도의 예금 규모가 전국은행의 예금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3.2%에 불과했다.

"막상 자금을 투자해야 할 시기가 되자 발기인단 내에서 차일피일 미루며 돈 대기를 꺼려 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당시 설립사무국에서 업무를 담당했던 신용남(전 충청은행 상임감사)씨는 "자본금 마련이 여의치 않고 발기인들의 이탈이 두드러져 설립준비위원회가 와해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며 "은행 설립이 이대로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고 회고했다.

이때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1967년 9월 15일 금통위 운영위원회가 발표한 지방은행 지원책이었다. '지방은행의 여신금리를 전국은행보다 연 3% 높게 책정한다는 것'과 '각 시·도 금고를 지방은행에 점차적으로 이양한다'는 내용의 획기적인 정부지원 방안이 발표되자 향후 사업성을 보고 자본금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창립 작업에 탄력을 받기 시작한 이웅렬 발기인 대표는 지역 자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서울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동시에 당시 공화당 당의장으로 2인자로서의 위세를 떨치던 김종필씨 등 정치권에도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에서 활동 중인 충남·북 출신 실업인과 한국은행 총재 등이 참가하는 간담회가 두 차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충청은행 설립의 당위성이 역설됐고 비로소 부족했던 자본금이 확충됐다.

간담회에 참석했던 신진자동차 김제원 회장과 한국화약 김종희 대표, 동아건설산업 최준문 회장, 삼부토건 조정구 대표, 동신화학공업 현수덕 대표 등이 분담해 7000여만원의 주식을 인수키로 결의한 것.

최대 걸림돌이었던 자본금 문제가 해결돼 1968년 2월 20일에는 대전상공회의소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임원 선임과 함께 대전시 중동 92-2번지 4층 건물을 은행 본점으로 사용키로 의결한다.

이어 4월 22일에는 본점 건물이 자리한 중동 중앙극장 앞길을 가득 메운 시민의 기대섞인 시선을 받으며 개점식을 갖게 된다.

이날 첫번째 거래 고객은 10만원을 입금한 박정희 대통령으로 민영훈 재무차관이 입금을 대신했고, 두번째 고객은 김종필 공화당 의장으로 기록됐다. 은행 설립 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사가 1, 2호 고객으로 기록에 남게 된 셈이다.

김 은행장도 개점 당일에는 창구에서 수납업무를 보았고, 은행 창립에 힘써 준 내빈고객들에게는 예금통장과 상아도장을 작은 기념상자에 담아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날 영업창구는 하루 종일 몰려든 고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단 하루 동안의 영업으로 2억 7100만원이 입금될 만큼 지역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본점 개점 이후에는 4개월 만에 당시 상업의 중심지였던 원동시장에 점포를 개설했고, 같은 해에 은행동과 청주지점, 천안지점 등을 잇달아 열며 지방은행으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져나가게 된다.

시중은행과 비교해 규모는 작지만 향토은행으로 지역발전에 일조한다는 점과 친밀하고 대중적인 영업전략을 구사한 점이 주효하며 이후 충청은행은 지역을 대표하는 지방은행으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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