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시제사대전공장
부지면적 26,750 건물 5,085평 제사기 400대, 종업원 약 600여명, 연간 조업일수 344일. 1930년 기준, 대전의 군시제사공장(郡是製絲工場)은 조선에서 다섯 번째로 큰 제사공장이었다. 생산량으로 치면 전국생산량의 5%, 충남지역 생산량의 64.5%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군시제사대전공장이 지금의 효동인 본정 3정목에 처음 문을 연 것은 1926년 6월로, 대주주는 일본의 3대 재벌에 하나인 ‘미쓰이’였다. 당시 미쓰이사가 소유한 군시제사공장은 조선의 대구, 대전, 청주 외 대만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다국적기업이라 할 만큼 광범위했다. 조업원의 대부분은 18세 이하의 미혼 여성들로 대전과 충남은 물론, 멀리는 개성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모인 소녀들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 군시제사대전공장에서는 크게 3차례의 대규모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첫 파업은 러시아가혁명기념일인 1932년 11월 7일에 일어났다. 남자 직공들이 일본인 간부를 구타한데에서 발단한 쟁의는 순식간에 6백여명의 여직공들이 가담하면서 대규모 동맹파업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인종차별 반대” “식사 개선” “조선인 해고 반대” “일본인 교육계장과 인사계장의 면직”이라는 총 6개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이들의 파업은 단호했고 투쟁은 격렬했다. 파업 7일째 경성 본사에서 간부직원이 파견되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면서 쟁의는 일단락되었다. 요구조건이 대부분 수용된 노동자들의 승리였다.

이후 대규모 노동쟁의는 1935년 8월과 1936년 8월 두 차례나 더 일어났다. 일제시대 초기 식민지 조선의 주요 갈등은 민족문제였다. 그러나 식민체제가 안정기에 들어선 1930년대에 이르면 민족문제로 환원되지 않은 계급, 젠더, 문화투쟁 등의 다양한 문제가 생겨난다. 조선은 그렇게 자본주의사회로 진입했고, 대전 역시 그 안에 있었다.

<글과 엽서의 저작권은 대전시청에 있습니다>

온라인팀 cctoday@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