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추진한 대표적 畿湖儒學者 … 묘역에 道路내, '反 세종'적 개발
유적공원 만드는게 최선의 선택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일제 때부터 조치원-판교(서천)간 철도 부설이 추진됐었다.

그때 철도 계획이 연기군 남면 종촌리를 통과하게 되었는데 유림(儒林)들의 반대에 부딪혀 총독부는 철로 방향을 바꿨다.

유림들이 반대한 것은 그곳에 있는 이유태(李 惟 泰)선생의 묘소가 훼손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 일대가 세종시에 편입되어 개발계획에 포함되자 1만 5000명이나 되는 전국의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묘역보존을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하고 청와대와 행복도시건설청에 제출도 했다.

최근 중앙 언론에서도 묘소의 심각한 훼손을 우려하고 나섰다.

세종시 건설 주체인 LH 공사가 묘역 가운데로 도로를 내는 바람에 봉분에서 좀 떨어져 있는 선생의 업적을 적은 신도비(神道碑)가 잠길 만큼 물에 차있고 그 모습이 매우 민망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보도다.

한글을 만들고 문화부흥을 일으킨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받드는 세종대왕-그래서 그 이름을 딴 세종시에서 이와 같은 反 ‘세종’적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면 이유태선생은 어떤 분인가?

선생의 호는 초려(草廬).

벼슬을 거부하며 살았음에도 조선왕조실록에 관련기록이 360번이나 나오는 인물이라는 데서 그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읽을 수 있다.

선생은 1607년에 태어나 1684년 세상을 떠나기 까지 율곡의 경세치용과 사계 김장생의 예학을 계승 발전시킨 기호유학의 대가이다.

인조 12년, 잠시 벼슬에 나갔으나 병자호란 이후 어떤 관직에 제수돼도 나가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하자 밀지를 내려 김집·송준길·송시열·권시 등 소위 ‘산림오신(山林五臣)’을 조정으로 불러들였으나 조정의 혁신을 펴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향리로 돌아왔다.

1685년 효종은 조야에서 계속 초려 이유태선생의 중용을 건의하자 그에게 지평(持平)의 벼슬을 내려 임금 가까이 두고자 했다.

이에 초려선생은 병자호란후의 피폐해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4만자에 달하는 국정쇄신책, 소위 ‘기해봉사(己亥封事)’를 작성했으나 전달 도중에 효종이 세상을 떠나 제출되지 못했다.

그 후 임금에 오른 현종에 이르기까지 15년에 걸쳐 초려선생은 이조참판 등 22번에 걸친 중책에 임명됐으나 일체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 (숙종 원년)에는 대사헌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예송에 휘말려 영변으로 유배를 당해야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공주 중호(지금 공주시 상왕동)에 칩거하다 1684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처럼 큰 의미를 지닌 선생의 묘소가 그것도 세종시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훼손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묘소와 신도비 사이에 굳이 도로를 내야 한다면 그 구간은 지하화로 할 수도 있고, 원형을 살려 유적공원을 만드는 등 여러 방안이 있을 것이다.

만약 유적공원이 된다면 세종시의 문화적 특징을 살리는 데도 잘 조화를 이룰 것이다. 무엇보다 묘소와 신도비는 하나로 묶여야 조선 중기의 묘제양식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되는데 단순히 도시 토목의 차원에서 가운데 길을 내고 신도비를 버리다시피 하는 것은 세종시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반문화적 행태가 되는 것이다. 세종시를 위해서도 초려 묘소를 훼손되지 않게 보존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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