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초대석] 취임 3개월 권희태 충남도 정무부지사
도청이전할 내포신도시 건설에 주력, 일할땐 불같지만 사실 부드러운 성품
청렴하고 실력키우는게 공직자의 본분…태안 유류사고 복구때 가장 큰 보람

충남도 민선 5기 안희정 호의 중반을 함께 끌고 갈 정무부지사 자리에 권희태 전 자치행정국장이 발탁된 지 3개월이다. 임명 당시 일각에서는 파격 인사라는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당 혹은 친노 진영의 인사를 내정할 것이란 게 당연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현재, 누구보다 민선 5기의 철학과 의지에 적합한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37년간 도정을 이끈 충남도정의 산 증인인 만큼 노련함을 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관료주의의 한계를 혁신하고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선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 부지사는 공직 사회에 큰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성실한 공직생활을 통해 책임 있는 자리까지 정직하게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며 후배 공직자들의 본보기가 됐다는 평이다. 충남도 최고의 싱크탱크로 불리며 가장 낮은 직급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행보를 보여 준 권희태 정무부지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들어본다.

대담=이의형 정치부장 겸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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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희태 충남도 정무부지사는 “말단에서 부지사에 오르기까지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가졌다”며 “후배 공직자들이 공부를 많이 하고, 보는 시야를 넓게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정무부지사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간다. 부지사는 어떤 자리인가.

“도지사가 도정을 펴나가기 위해 의사결정을 하는데, 이 과정에 정무적 판단이 필요한 사항을 보좌하는 것이 기본 역할이다. 언론과 도의회, 중앙 정부, 사회단체와 긴밀한 소통을 통해 도지사가 시책을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행정업무에 정무적 판단이 들어가는 게 많다. 오랜 공직 경험을 토대로 업무 처리의 지침을 잡아주는 역할도 있다.”

-현재 주요 업무는 무엇인가.

“가장 큰 현안과 사업은 3농혁신과 내포신도시 건설이다. 정무부지사로서 내포신도시 건설과 도청이전본부를 총괄하고 있다. 단순 도청이전이 아닌 300만 평의 공간에 인구 10만 명을 정주시키는, 하나의 독자적 생활권을 만드는 사업이다. 여러 측면에서 교통 정리할 상황이 많다. 도청 이전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청 직원들이 거주할 숙소와 경찰청, 교육청 종사자들이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는 초기 생활권 형성이 숙제다. 이게 좀 힘들다. 아파트 건립도 2013년 넘어서야 제대로 될 것 같고, 아파트가 건립돼야 병원, 학교, 대규모 쇼핑몰이 들어올 텐데, 현재는 내포신도시 건설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공직 생활은 언제 시작했나.

“20살인 73년 12월부터 했으니 38년 됐다. 당시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 공직에 입문했다. 학교를 다니면 72학번인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재수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우들이 4명이 있다. 일선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할 형편이었다. 공직 월급은 사실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 시절 월급은 1만 8000원으로 쌀 한 가마가 5000원 했다. 첫 공직은 부산에서 시작했다. 대전에서 시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공무원 연고지 배치가 국가 시책으로 추진돼 고향인 대전으로 75년 9월 15일 왔다. 근무는 동사무소였다. 그러다 77년도 9월 1일 동구청과 중구청이 생겼다. 그 후 대전시청을 거쳐 80년 9월 충남도청에 왔다. 도에서 31년 째 근무다. 금산에서 8개월, 공주에서 6개월간 부군수도 해봤다.”

-싱크탱크 혹은 경제전문가로 평가되고 있다.

“기획 분야에서 많이 근무했다. 사무관 되기 전 자치행정과에 6년 있었다. 도와 시·군에서 중앙정부 시책을 담당하며 실무 역할을 했다. 사무관 승진 후 종합개발 및 정책실 분야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를 경험하며 느낀 것은 공무원들의 생각이 좁다는 것이다. 항상 생각하는 머리를 다섯 개 정도는 돌려야 한다. 도의 현안을 비롯해 시·군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도청 내부 시·군 공직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라 전체적 분위기는 어떤지,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이때 많이 했다. 경제국장을 담당하면서도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배분할 때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공직 생활 입문 시절과 현재 공직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다면.

“두 가지 측면의 변화가 있다. 첫째, 국민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70~80년대 우리나라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할 때는 공직에 매력이 없었다. 사무관 이상 고위직은 선호하는 분위기이었지만 하위직의 공직 선호는 낮았다. 반면 현재는 공직이 사회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분위기다. 경쟁률만 해도 70~100대 1이 넘는다. 그러나 예전에 공직은 하고자 하는 일은 다 했다. 특히 관선시대 공직은 하향식 계획으로, 시책 침투하면 그대로 반영됐다. 반면 95년 민선 시대 이후 공직 위주의 행정은 펼치기 어렵다. 이해 관계자와 협의한 후 시책을 펴야 충분히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점이 달라졌다.”

-성격이 급하고 불같다는 평이 있다,

“사실 부드러운 사람이다. 단 원칙이 하나 있다. 성격이 급해 직원들을 닦달하는 것은 일과 관련된 사항에 한하고 있다. 따라서 조직 내 수용이 가능한 것이다. 일과 관련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 거칠게 다룬 적 없다. 그렇다면 수용되지 못한다. 물론 일하다 서운한 게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일이 끝나면 허리띠를 풀어 놓고 대포 한 잔을 하며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노력한다.”

-독실한 불자로 알고 있다.

“마음속에 불자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 정기적으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거나 법회에 참석한다. 불자모임 회장직도 맡았다. 이는 도청 내 국장직에 있으니 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저보다 돈독한 신자분들이 많다. 제가 회장이 된 것은 신자가 결속하고 보다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라는 부름으로 알고 있다. 불자로서 특히, 절에 가면 마음의 안정이 있다. 절에서 욕심을 버려두고, 많은 것을 비우고 온다.”

-부하 직원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 있다면.

“첫째는 업무에 대한 열정이라 본다. 업무에 대해 얼마나 열정을 갖는가가 가장 큰 평가 항목이다. 이 평가를 가장 큰 잣대로 삼고 있다. 또 하나는 업무에 대한 정통성과 집행력을 같이 기준으로 삼고 있다.”

-공직생활 중 가슴에 남은 게 있다면.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 사건이 공직에 있어 가장 어려웠고 가장 보람이 있었던 1년 3개월이다. 사고 난 후 일주일 됐는데 당시 이완구 전 지사가 태안에서 지휘봉 잡고 해결하라, 해결할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태안유류대책사고 본부장으로 간 후 엄청난 양의 기름을 제거하며 노력했다. 그 덕분에 다음 해 6월 해수욕장이 개장됐다. 그 때 어려웠던 것 다 잊고 보람을 느꼈다. 태안에 있으면서 어떻게 빠른 시일 내 6개 시·군 10만여 명 피해자가 생업에 빨리 복구할 수 있을까 항상 마음을 가졌다. 특히 자원봉사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123만여 명이 다녀갔다. 실로 고맙게 생각한다. 그분들 아니었으면 빨리 해결 할 수 없었다.”

-아쉬움으로 기억되는 일은.

“정책결정에 있어 다양한 이해가 상반되는 업무가 있다. 특히 경제통상실에 있을 때 많은 민원이 있었다. 이 문제와 관련 세밀한 검토와 이해당사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야 하는데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에 관심을 둔 것 같다. 특히 황해경제자유구역과 예산 주물단지 등 꼼꼼히 따졌지만 아직도 이견이 있고, 주민들을 완전히 포용하지 못했다. 시간을 갖고 처리 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배들의 롤모델이다.

“공직에서 오래 근무하고 자기발전을 하기 위한 첫 번째 덕목은 자기 실력을 많이 키워야 한다. 두 번째는 공정한 업무처리를 해야 한다. 우스갯소리 하겠다. 동서고금 통해 진리가 딱 2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소금 먹은 사람이 물켜고, 많이 아는 사람에게 꼼짝 못한다. 하나는 청렴을 강조하는 것이고 하나는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롱런할 수 있다.”

-성공적 공직생활자인데, 가정에서의 점수는.

“가정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100점 만점이라면 한 30점. 그래도 가족과 함께 있으려 노력한다.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가족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줘서 다행이다.”

-앞으로 점수를 높이기 위한 계획이 있는지.

“작은 일부터 집안 대소사 챙기는 것 까지 모두 안식구에 일임했다. 이를 내가 다시 맡기는 어렵고, 아무튼 고맙게 생각한다. 다만 식구가 원하는 몇 가지 사항이 있다. 공직을 마무리하면 한 달 정도 부부동반으로 못가본 나라도 여행할 계획이다. 특히 건강을 챙길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겠다.”

-자녀들이 총명하다고 소문났다.

“아들과 딸이 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공부를 같이 했다. 나는 공직 생활하며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 졌다. 또 하나 있다면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에게 꼭 편지나 전화로 대화를 나눴다. 아이들이 필요한 게 있으면 엄마보다 나를 찾는다. 그럴 때마다 바쁜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의 일을 해결해 주고 다시 일을 했다. 이렇듯 직접 대화보다 편지로 소통을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나눠며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했다. 이 점에서 아이들이 높은 점수를 주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그동안 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말단에서 부지사에 오르기까지 때론 좌절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보인다면 언젠가는 나도 국장까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정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첫 번째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재직중에 공부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두 번째는 보는 시야를 넓게 가졌으면 좋겠다. 어떤 인사와 관련 일희일비하지 말고 맡은 일에 묵묵히 정진하면 보상이 뒤따른다. 진정성 갖고 도민과 지역을 위해 매진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훌륭한 후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친구와 많은 지인들이 격려하고 지원해 준다. 이 점도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도청은 대단히 고마운 직장이다. 도청 건물 바라볼 때마다 늘 고맙게 생각한다. 집 한 칸 장만할 여건을 마련해 준 것도 도청이다. 후배가 잘되고 충남이 잘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퇴직 후에도 이를 짊어질 각오가 있다.”

정리=박재현 기자 gaemi@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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