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김영덕 前 빙그레 이글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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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람]김영덕 前 빙그레 이글스 감독
  • 이인회 기자
  • 승인 2002년 12월 23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2년 12월 23일 월요일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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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와 함께 땀흘리던 마운드가 그립습니다"

먹고 먹히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는 팬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프로스포츠의 묘미다.
약한 자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강한 자는 실력에 부합하는 돈으로 '귀하신 몸'의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 프로무대의 생리.
전 빙그레 이글스 감독 김영덕(金永德·66)씨는 그 단맛과 쓴맛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20년 한국 프로야구사 영욕의 산증인이다.

프로다운 프로를 길러낸 절제된 조련사, 명장 김 감독의 야구인생도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원년 프로야구를 마수걸이한 영예부터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물먹으며 맞은 숱한 원망의 화살까지 그 달콤 쌉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지만 태생지는 '조센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던 일본이다.

다부진 체격에 운동신경을 갖춘 그는 야구 하나로 동네를 주름잡았다.

포지션은 투수, 차별대우에 항변하듯 설움을 실어 뿌려대는 공을 배트에 맞출 또래는 흔치 않았다. 본격적으로 야구수업을 받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 실력 있는 야구 유망주에게 더 이상 냉대 섞인 낙인은 없었다.

그러나 배움의 한(恨)으로 자식들은 학업에 열중해 성공하길 바랐던 부친의 반대는 만만찮았다.

"앞날이 불투명한 운동을 한다는데 손들어 줄 부모들이 어디 흔하겠습니까. 완고하신 아버지였지만 반드시 프로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어린 자식의 의지가 믿음직스러우셨는지 허락해 주십디다."

즈시 가이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오사카를 연고로 한 혹스(hoaks·후쿠오카 다이에 혹스의 전신)에 입단하며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

3년간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2군 생활을 하던 그에게도 기회는 찾아왔다.

프로 4년차 꿈에 그리던 마운드에 오른 김 감독, 그러나 6승6패의 성적이 말 해주듯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신예의 대열에는 끼지 못했다.

몸 만들기에도 실패해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결국 8년간의 고단한 프로생활을 접어야 했다. 당시 한국에서 열린 한 야구대회만 아니었다면 김영덕이라는 이름은 그저 그랬던 왕년의 프로야구 선수 쯤으로 잊혀졌을 것이다.

"일본에서 실력에 한계를 느끼고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한국이 아시아대회를 제패하는 일대 사고를 쳤습니다. '모국에서 해보자'는 자신감이 솟더군요. 때마침 백인천 감독의 권유도 있고 해서 해운공사에 입단했습니다."

미 수교 상태에서 재일교포의 국내 활동이 쉬울 리 만무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터, 어떤 불편이나 제약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해운공사 도쿄지사 파견근무 명함으로 한국아마야구에 등장한 김 감독은 말 그대로 '물 만난 고기'였다.

승승장구는 팀 해체로 일시 멈춤 상태에 빠졌지만 물 오른 그는 이내 한일은행의 에이스 자리를 꿰찼고 이미 야구선수에게는 환갑에 가까운 30줄을 넘어선 그였지만 녹슬지 않은 솜씨로 명문구단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65년 영구 귀국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니 선수생활도 수월해 지더군요. 당시 한일은행에는 김인식(현 두산베어스 감독), 김응룡(현 삼성라이온스 감독) 등 쟁쟁한 선수들이 즐비했어요. 나이들어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든든한 후배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68년 은퇴한 그는 곧바로 친정팀 한일은행의 코치로 승격한 뒤 70년 지휘봉을 잡았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보증 사기로 낭패를 본 그는 은행을 그만두고 야인이 된다.

그러나 악재는 얼마지 않아 명장으로 스스로 담금질 할 수 있는 기회로 재생됐다.

서울 장충고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 감독은 신생 천안 북일고로 부임하며 제2의 고향 충청도와 질긴 인연을 맺는다.

북일고의 시작도 순항 앞에 암초가 있었다.

모 기업인 한국화약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지역 예선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전고등학교만 만나면 마법에 걸린 것처럼 힘을 못쓰더라고요. 번번이 쓴잔을 마시니 말이 많아집니다. 왜 못이기냐는 질책이었죠. 첫 술에 배부를 수 있습니까. 회장님만은 달랐습니다. '감독의 소신대로 밀고 나가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시더군요."

약발은 전국대회 2관왕이라는 틈실한 결실로 맺어졌다.

80년 봉황기를 제패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고교야구에 혜성처럼 등장한 뒤 이내 화랑기 마저 손에 쥐었다.

한화이글스 이상군 코치, 단국대 김경호 감독, 김상국 현 북일고 감독 등이 당시 맴버들.

"연습벌레라는 별명도 그 시절에 붙여졌습니다. 워낙 혹독하게 시켰거든요. 제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후배들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북일고의 상종가로 그의 주가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별 재미를 못 본 그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82년 프로 원년 그의 조련을 받기 전까지 OB베어스는 결코 주목받은 팀이 아니었다.

투수는 김성근(전 LG감독) 코치, 타자는 이광환(현 LG감독) 코치가 다듬으며 현상유지를 준비했을 뿐이다.

프로야구 인기몰이의 선두주자 박철순 투수의 빼어난 활약에 기대 이상의 선전을 해 준 선수들의 오기가 더해져 OB는 최고들이 뭉친 삼성을 제치고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었다.

제물이 된 삼성라이온스가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일궈 낸 85년에는 삼성 감독이었으니 적어도 초반에는 우승 제조기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러나 6년 동안 네 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빙그레 이글스에서 만큼은 승리의 여신도 그를 외면했다.

"만년 2등에게 죽고 싶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겠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네 번이나 되새김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모든 책임은 이유를 막론하고 감독에게 쏟아졌습니다."

우승을 위해서는 구단의 든든한 후원과 선수의 질, 운이라는 삼박자에 감독의 지도력이 가미돼야 하는 법.

빙그레에는 이름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이 분명했다.

"소탐대실입니다. 거짓말이라도 '우승만 한다면 무엇인가 해 주마'라고 사기를 올려 줬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LG 2군 감독의 옷을 벗은 98년 그는 40 여년 야구인생을 접는다.

한국 야구를 바라보는 그에게 못 마땅한 구석이 한 둘이 아니다.

"한국야구는 고교부터 단추를 잘 못 꿰고 있습니다. 최소 1년에 6∼7개 대회에는 출전해야 하는 혹사 속에서 공부는 뒷전이고 스파르타식 훈련에만 치중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나중을 생각해야죠. 모두 일류가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재미있는 야구를 가르쳐야 합니다."

시대를 잘 못 타고 난 것일까, 최고에 손색없던 그였지만 요즈음 웬만하면 넘는다는 억대 연봉은 꿈에 불과했다.

한국프로야구위원회의 찬밥대우도 불쾌하기 이를 데 없다.

"프로는 몸 하나로 먹고사는 직업인데 연금도 없습니다. 돈 안 받아도 좋으니 뒷전에서 야구발전을 위해 일하게 해 달라는 요청도 보기 좋게 거절당했고요."

그런 이유에서인가 그는 후배들에게 공인으로의 모범과 절제된 생활정신을 주문했다.

뒤늦게 배운 골프 재미가 쏠쏠하다며 웃는 김 감독.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장의 눈매는 옛 시절과 같은 생기가 스며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