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번 싸워 23번 다 이긴 전쟁기록, 오히려 日本이 忠武公 연구 활발
우리 政治, 忠武公 마음 닮았으면

"하늘 아래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사람이 없을 것이다"(1595년 11월 1일)

이것은 지난 2008년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가운데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일기에 나온 내용이다.

문화재청이 아산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를 번역하다 밝혀진 것.

사실 '난중일기'라는 제목 자체가 충무공이 처음부터 붙인 것이 아니다.

충무공은 자신의 일기가 훗날 '난중일기'로 명명되어 세상에 알려지고 국보로 지정될 것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우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많다.

술을 마신 기록이 140회가 넘고 자신의 신병을 언급한 것도 180회나 된다. 그렇게 지극히 인간적이고 열정에 넘쳤다.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한 탓인가 하여 소주를 마셔 다스리려 했다가…10여 차례 토하고 밤새 고생을 했다"(1597년 8월21일)

"잠시 후 종(순화)이 와서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전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랴"(1597년 4월 19일)

이와 같은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난중일기 속에는 전략 전술에 관한 기록 또한 많다.

그런 면에서 충무공에 대한 존경심은 일본에서 조차 당연시 되고 있다.

노·일 전쟁 때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함대사령관은 출항을 하기 앞서 충무공 혼령에 도움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사실 우리는 마음으로 충무공을 존경하는 데는 나무랄 데 없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소홀했었다. 그러나 충무공을 가장 열심히 연구한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충무공에게 비참한 패배를 맛본 일본이고 그 다음이 영국 등이다.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충무공에 대한 인물, 사상, 전략을 샅샅이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메이지 시대 일본이 근대적인 해군을 창설했을 때 충무공의 전략을 체계화시켰을 정도다

그런데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하게 충무공 연구나 현양사업이 전개되고 있어 다행이다.

해군이 지속적으로 거북선에 대해 탐사하고 연구하는 것이라든지 서강대학 지용희 교수같이 23번을 싸워 23번 승리한 충무공의 그 완승의 비책을 경영학적으로 접목하려는 시도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더욱 반가운 것은 문화재청이 난중일기를 2013년 선정될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난중일기'는 국보로서 역사적 사실과 학술연구 성과 등이 충분히 검증됐고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물을 남긴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등재신청 후보로 추천한다는 것이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특히 우리 충청인 으로서는 더 없이 기대되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국가의 미래는 생각 않고 당리당략에 빠져 나라가 혼란스러운 요즘 충무공 같은 '나라사랑'의 정신이 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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