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1. 이번 러시아 정부가 승인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문서 전시장에서 공개한 안중근의사 의거 전후의 기록은 감춰져 있던 기록이 100년 만에 공개된 것으로 만시지탄이 있으나 이 기록들이 모두 진실인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 당시에 러시아군이 의거현장에서 안의사를 체포하고 불과 14시간만에 모든 기록과 신병을 일본군에게 황급히 인계했다고 하는데 그 초동수사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안의사가 의거한 1909년 10월 26일보다 4년 전 일러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미국 포츠머스에서 전후강화조약을 체결했었다.

(2) 그 강화조약에 일본국을 대표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의 특명을 받고 참석한 전권 외상 고무라 쥬타로는 러시아 대표에게 △항복문서에 조인하라 △사할린섬의 반을 일본영토로 귀속시켜라 △쿠릴열도 (일본명칭 千島列島)와 아류산열도의 2개 섬(앗쓰도, 기스카도)도 일본에 영유권을 넘겨라 △旅順의 영구조차권을 일본에 넘겨라 △앞으로 일본과 러시아는 공존공영하는 친선평화조약(불가침조약)을 맺고 세계무대에서 동맹국이 되어야한다 △러시아가 부설한 만주의 동북철도 (하얼빈-장춘-여순)운영권을 일본에 귀속시켜라 △만주전역의 군사주둔권을 일본이 장악한다는 내용 등이었고, 러시아는 이 모든 것을 수락하는 강화조약에 서명했던 것이다. 이로서 만주일대는 완전 일본이 장악하게 된다.

안의사는 거사일을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과 협의하기 위하여 하얼빈역에서 만나는 시점을 선택했다. 안의사는 러시아군 명예사령관직을 겸하고 있던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도중 불과 30초 사이에 권총 7발을 발사하고 나머지 1발로써 순국하고자 하였으나 러시아 군인들이 덮쳐 체포된 것이다. 발사된 7발은 3발을 히로부미에게 쏘았고 나머지 4발은 히로부미를 수행하는 일본관료에게 쏘았으며 뒤엉켜 있던 러시아 고위관료에게는 쏘지 않았다.

2. 러시아를 패망시키고 전후 러시아를 요리하고자 하는 원흉의 말로(末路)를 목격한 러시아 고위급간부(외교관, 군인)는 러시아 정부에 보고문을 보냈고 이번에 공개된 것이 거의 전부인데, 보고서 내용과 표현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를 공작으로, 안의사를 ‘살인자’, ‘범죄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는 러시아 조문사절단을 보내야한다는 현지 공관장의 보고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은 일본 최대 최강의 관동군(關東軍)을 만주에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만주일원의 군정을 맡고 있었다. 처신을 잘 못하면 제2의 일러전쟁을 걱정할 처지에 놓였던 것이 러시아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이번 공개된 역사기록(보고서)은 감정을 속이고 일본의 눈치를 보며 작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안의사는 러시아 수사진에게 본명을 속이고 가명을 대고, 신분과 현주소를 적당히 밝히고, 동지를 보호하기 위해 공모자는 없다고 진술했다. 취조 중 “이토 히로부미가 숨을 거두었다”는 러시아 수사관들 간의 말을 들은 안의사는 벌떡 일어나 “사명을 다한 것을 신께 감사한다.”고 기도했다 한다. 그 날 부로 신병이 일본 헌병대에 인계되었는데 그 때 비로소 안의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한다.

본명은 ‘안중근’ 직업은 ‘대한민국 독립군 부사령관’ 공모자는 ‘없음’ 이라했고 거사 동기는 “나는 군인신분이다. 군인이 전투에서 적을 죽이는 것이 왜 살인이 되는가? 그저 군인의 본분을 다한 것이다.” “나는 범법자가 아니다. 불행하게 포로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제네바 협정에서 정한 전쟁 포로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나는 인간 히로부미를 살해한 살인범이 아니다. 아시아 평화를 유린하는 원흉을 없앤 것이다. 나는 평화론자이다.” “머지 않아 일본은 처참하게 패망할 것이고 그때는 일본사람들이 일본 망국의 원흉은 바로 히로부미로 자각할 때가 온다.”

“爲國獻身은 軍人의 本分”이라는 휘호는 그때 수사관에게 써준 휘호였다고 한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신병을 인수 받은 책임자는 관동군사령부 특무부대소속인 千葉十七이라는 特務上士로 6개월 후 총살당할 때까지 여순감옥에 수감된 안의사의 감시책임자이자 보호자였으며 안의사 관련 수기를 써서 후대에 자세히 기록을 전하게 된다. 千葉 상사는 안의사 처형 후 바로 참회하여 자진 제대를 해서 落鄕하고 고향 미야기현(宮城縣)시골에서 은거했으며 안중근의사의 숱한 휘호를 걸어 놓고 받들며 7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루세끼 영전에 봉헌하고 참배했다한다.

그리고 이 자료를 하나뿐인 아들에게 전하며 “나의 수기와 안의사의 유품을 근거로 훌륭한 문필가에게 부탁하여 책으로 출판해 달라.”는 유언을 했으며 아들은 저명한 논술가이자 소설가인 ‘재등태산’ 주지스님(大林寺)께 부탁해 출판한 책이 ‘나의 마음속의 안중근’이라는 논평이 포함된 소설이고 이 책은 한때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이 책의 부제는 ‘千葉十七, 合掌의 生涯’이고 표지에 다음과 같은 주제가 크게 적혀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을 일본은 사형에 처했다. 그 진실을 재판한 것은 누구의 짓이었는가? 지금 바꾸어서 역사의 심판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한 문제의 원점에 예리하게 메스를 가하는 절절(切切)한 역사 소설”이라고 붙였다.

이 책을 읽고 감동한 미야기현 山本 壯一郞 지사는 현직지사의 이름으로 현창비(顯彰碑)를 세우고 안의사의 영웅됨을 기록하였다.

그 책에는 ‘지금도 동경도 중심가에는 공원만한 넓은 이토 히로부미의 고택이 보존되어 있다. 일본을 급기야 망하게 한 일본민족반역자의 고택을 정부가 보존시켜줄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평화론자인 안중근 영웅의 사당과 기념관을 그곳에 세워야한다’는 주장도 사양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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