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헤쳐나간 자신감 원천은 고향

▲ 조선형 걸스카우트 총재
"지난 2002년 2월 미 부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로라 부시가 유일하게 한국걸스카우트를 방문해 회원들과 시간을 가졌었는데, 가장 뜻 깊은 행사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해요."

대전·충남 여성단체의 대모로 불리고 있는 한국걸스카우트 조선형 총재. 충북 음성에서 출생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60년 가까이 대전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조 총재는 고향하면 당연히 대전이 떠오른다고 자부한다.

조 총재는 공직자인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중학교 2년 때까지 2년을 주기로 이사를 하고, 학교를 옮겨야 했다. 조 총재가 전주 사범에 잠시 입학했던 해에 6·25 전쟁이 발발했으며, 제주도로 피란갔다가 대전여중에 2학년으로 복학했다. 조 총재는 이리저리 학교를 옮겨 다녔어도 학년 전체 수석은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고 단언했다.

조 총재는 대전여고 시절, 전국체전에 나가서 마루체조 1위를 했다. 중학교 때까지 운동을 한 적도 없고, 이 학교의 체조부가 바로 그 해에 창설됐다는 점에서 조 총재의 이런 경력은 특이하다.조 총재는 "내 몸이 원래 유연했어요"라고, 싱긋 미소짓는 걸로 의문점을 해소하려 했다.
물론 부모님은 그거 하다가는 시집도 못간다며 교장을 만나 안시킨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지만, 조 총재는 체조를 끝까지 고집했다.전국체전에서 1위를 하자, 주요 일간 신문들이 스포츠면 전면에 대서특필했고, 남학생들이 조 총재 집 앞에서 얼굴 한 번 보려고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고3 때 무시험 추천으로 이대 영문과에 지원했지만, 성적순으로 뽑아서 결국 낙방했다. 오기가 생긴 조 총재는 모든 활동을 다 접고, 성적에 승부를 걸어 다시 이 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당시 이대에서는 정치외교학과, 영문과, 가정과가 가장 선호하는 과였으며, 그중 영문과가 가장 경쟁률이 치열했고, 점수도 높았다. 조 총재는 고등학교 때 단 1년만 공부해서 입학한 것이니 그 또한 특이한 이력이다.
"물론 공부를 아예 손놓은 것은 아니지만 무용, 공부, RCY(적십자 봉사활동) 등을 동시에 해냈는데, 그때부터 바쁜 기질을 타고 난 것 같아요."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데, 무리를 지어서 만나야지 한 두 사람만 만나 얘기를 하는 것은 적성에 안맞는 거 같아요."
잦은 전학과 그로 인한 수많은 친구들과의 만남, 다양한 학내 활동 등은 조 총재의 화려한 사회활동의 근간이 됐다.
조 총재는 대학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못했다. 남편을 일찍 만났기 때문이다.

조 총재가 입학하던 그해 겨울, 아버지가 대전시장에 출사표를 던졌고, 연설원을 고용해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조 총재는 그 연설원을 돌려보낸 뒤, 직접 마이크를 잡고 홍보 연설을 했으며, 함께 내려온 대학 친구들은 유인물을 나눠 주었다. 이대생들이 나서서 돕고 있다는 소문 덕택에 수많은 남자 유권자들이 몰렸다. 아버지는 시장에 당선됐고, 적극적인 조 총재의 모습에 반한 남편에 찍혀(?) 조 총재 역시 그와 결혼에 골인했다. 그때가 대학교 2년 때였고, 학칙에 따라 조 총재는 학교를 그만뒀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딛던 68년 조 총재는 사회활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기관장의 부인이셨던 어머님 때문인지 결혼 후에도 사회 활동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조 총재는 '벽돌 모으기', '시멘트 모으기' 등의 운동을 벌여, 걸스카우트 충남연맹 건물을 멋들어지게 신축했으며, 38세의 나이에 최연소 걸스카우트 충남연맹장에 등극했다. 강창희 의원의 어머니 문장희 여사에 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당시 연맹장은 60대 이상의 시장, 교육감의 부인들이 하는 게 관행이었음에 비춰볼 때, 파격적인 진급이었다.

그러나 대전시가 충남도에서 분리되자 문제가 발생했다. 대학을 가고자 하는 고교 소녀들로 인해 걸스카우트 참여 인원이 줄어들고, 또 결혼 후 집안을 돌봐야 할 여 선생들에게 토요일까지 봉사활동을 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때가 대전과 충남의 행정구역이 분리되던 시기였기에 함께 쓰던 건물이 분가되어야 할 위기에도 봉착했던 것이다. 조 총재는 수많은 지인의 만류와 눈물을 뿌리치고, 연맹장직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1년 후 조 총재는 여성유권자연맹으로부터 '충남연맹을 만든 뒤 연맹장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조 총재는 고민을 거듭하다 수락했고, 지부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신낙균 전 장관에 이어 중앙회 회장에 취임했다.

"도·농간의 격차가 심한 시절이었어요.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것만으로 주변 사람들이 얕잡아 보는데 정말 힘들더라구요. "

조 총재는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잘했지만, 설마 서울에서야 잘 하겠어"라는 비난이 예상되자 오기가 생겼다.

"내가 인정받아야 다른 후임들이 지방에서 올라와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우리도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 총재는 역대 회장 중에서 가장 많이 국제회의에 참석했으며, 현재 연임 중에 있다.

조 총재는 한국걸스카우트 총재로 오기 전에 결정적인 기로에 선 적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이계순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 때는 신낙균 회장이 장관으로 발탁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권자연맹 회장 자리는 정계 진출의 실크로드로 불렸었었죠. 나 역시 그쪽을 염두에 두긴 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걸스카우트로부터 총재 제의가 들어온 겁니다."

걸스카우트는 내부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난국을 타개할 인물로 조 총재를 점찍어 둔 것이었다.

조 총재는 고민했다.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걸스카우트 총재로 그동안의 사회활동을 마무리짓는 게 보다 명예롭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전이나 충남지역에 있는 여성사회단체는 대부분 조 총재가 만들었다. 그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가 발탁한 사람들이 회장으로 취임해 그 모임을 이끌고 있다.

"여성의 권한을 신장시키고 향상시키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여성계가 보다 더 발전하고, 전진하는 데 앞으로도 주력할 것이며, 여성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서 여성의 몫을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하는 데 힘쓸 생각입니다."

조 총재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진지고, 지금까지 쌓은 업적의 바탕이자 뿌리라고 정의했다.

"고향은 나를 길러 주고, 인격을 만들어 주고, 친지를 갖게 해 준 곳이죠. 늘 고향이 날 따뜻하게 감싸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도 꿋꿋히 내 몫을 했던 것입니다." 고향을 생각하면서 자신감 있게 살아왔던 조 총재는 서울(직장)과 대전(집)을 일주일마다 오가며, 한국걸스카우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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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음성 출생 ▲1955년 대전여고 졸 ▲59년 이화여대 영문학과 수료 ▲86년 충남대 행정대학원 수료 ▲96년 연세대 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77∼1989년 한국걸스카우트 충남연맹장·이사 ▲ 84년 충남여성단체협의회장 ▲91년 대전여성단체협의회장 ▲96년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 ▲98년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총재(현) ▲2000년 21세기여성정치연합 공동상임대표(현) ▲2000년 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현) ▲2001년 청소년연합회 부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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