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점령때 몽골군이 사용한 텐트를 설치해 놓은 다카시마섬(사진·왼쪽)과 몽골군과 전투를 벌인 다카시마바다.

몽고군이 1281년 상륙했던 북큐슈의 다카시마 섬은 이제 긴 다리가 놓여있다. 하지만 다리의 효과를 보려는 참에 지난 3월 일본 동부 대지진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 섬 전체가 한적하기까지 하다. 6월 4일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축제를 마친 우리 일행은 몽고군이 일본에 상륙하고 진을 쳤던 전략적 요충지 다카시마 섬으로 이동, 언덕에 세워진 몽고식 텐트(이구르)에서 하룻 밤을 보냈다.

소위'몽고 체험'을 한 것이다. 일본은 이처럼 특별한 소재를 발굴하고 개발하여 관광상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다카시마 섬만해도 일본 역사상 외국의 군대가 일본 본토를 점령한 첫 케이스라는 점을 착안하여 몽고군이 진을 쳤던 언덕위에 몽고식 텐트를 설치하고 그 역사를 체험케 하는 테마 관광지를 개발한 것이다. 몽고는 두 번에 결쳐 일본을 침공했다. 1274년과 1281년. 원(元)으로 나라 이름을 정한 쿠빌라이(세조)때 이런 침공을 감행했는데 그때 마다 우리 고려군이 앞장섰다. 송 나라를 정복하고서 잡은 병력 10만명도 투입하여 모양은 연합군 형태였지만 주력부대는 우리 고려군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몽고군은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뛰어났지만 해전에는 취약했기 때문. 그들은 배만드는 기술도 없고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도 어두웠다.

그래서 이미 몽고에 항복을 한 고려로서는 어쩔 수 없이 1차 침공때 8000명, 2차 침공에 1만명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수적으로는 몽고군이 많았지만 전적으로 고려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강압에 의해 병선(兵船) 300척을 제조했는데 이 때문에 지금 전라북도 변산반도 일대의 재목들이 싹쓸이 벌채를 당했고 전국에서 목수, 인부 등 3만명이 동원됐으니 고려가 얼마나 몽고에 시달렸나 짐작이 간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1274년 10월 합포(合浦 ? 지금의 馬山)를 출발, 화약과 집단전법으로 상륙에 성공했으나 때마침 태풍이 몰아쳐 바다에 떠있던 병선이 침몰하는가 하면 1만3000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을 한다. 1281년의 침공때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한 번 당한 일본은 이곳 다카시마에 20km에 달하는 성을 쌓고 완강히 대항했지만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 무너졌고 연합군은 2개월의 공방을 벌이며 후쿠오카로 진격하기위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또다시 태풍으로 1만명의 병력과 수많은 배를 잃고 퇴각하고 만다. 사실 계절적으로 10월을 전후해서는 일본 열도가 매년 태풍의 기습을 받는데 그 해의 태풍은 일본을 외침에서 구한 것이 되고 그래서 그들은'신풍'(神風 ? 가미가제)라고 까지 받든다. 신이 이르킨 바람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때 이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고려군은 일본을 점령하고 몽고와 함께 이곳을 지배했을 것이다. 비록 몽고(元)와의 공동지배라 해도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닐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렇게 되었더라면 오늘 한 ? 일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카시마 몽골 텐트앞에서 그 옛날 고려와 몽고군의 병선이 뒤덮었을 바다를 바라보며 착찹한 생각에 사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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