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혼 간직한 천년고찰

울창한 숲 사이로 8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오랜 도량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비암사(碑岩寺).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에 위치한 비암사는 사찰을 둘러싼 숲과 인근 고복저수지가 어울려 사시사철 옛 산사의 풍취를 한껏 풍긴다.

전의면에서 공주 정안면 쪽으로 691번 국도를 타고 약 7.5㎞ 정도 가면 왼쪽에 비암사로 가는 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따라 약 1.5㎞ 정도 올라가면 운주산 남향에 비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규모가 큰 사찰은 아니지만 아담하고 기상이 뚜렷해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이라는 게 이곳을 다녀간 등산객들의 한결같은 대답이다.

창건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도는 알 수 없으나 후백제의 유민들이 역대 왕과 충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7세기경 세웠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학계에서는 이 곳에서 출토된 납석제 불상이 삼국시대 말 백제인의 작품으로 평가돼 사찰이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의면지에는 예전에 이 곳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된 사례로 미뤄 인근 적석총 또한 신라의 대학자 최지원 딸의 무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비암사에 얽힌 전설 또한 진기하다.

예전에 비암사에 귀거했던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이 절을 떠나기를 몹시 싫어해 죽어서 뱀으로 남아 이 절의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고 한다.

실제 이 뱀은 수년 전 사찰 증축 당시에도 나타나 절 주변을 맴도는 모습을 당시 스님들이 목격했다고 전했다.

현재 사역의 동쪽에 대웅전이, 서쪽으로 치우친 곳의 중앙부에는 극락보전과 그 앞으로 삼층석탑이 위치한다.

대웅전의 전방에는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사역의 가람 배치는 일정하게 형성돼 있지 않으며, 후대에 개·보수로 인해 상당히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극락보전과 삼층석탑은 조선시대 이후로 원상을 유지하면서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9호인 극락보전은 정면 3칸(11.5m), 측면 2칸(7.70m)의 목조건물로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배흘림이 뚜렷한 단주를 사용했다.

정면의 3칸은 기둥 사이를 동일한 간격으로 분할하고 사면각 띠살문을 달았으며 측면과 후면은 모두 회벽으로 막았다.

내부 살미첨차는 운궁형을 이루고 있으며 연꽃이 3개씩 조각돼 있다.

지붕의 가구방식은 대들보가 앞뒤 평주에 걸쳐 있으나 불단좌우에 옥내주를 세워서 중간에서 그 무게를 받쳐주고 있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서 종량을 받치게 하고 그 하부에 우물천장을 가설, 불단 위에는 닫집이 만들어져 있다.

이 닫집은 제작 기법이 독특하면서 화려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안에는 아미타불좌상이 안치돼 있는데 삼남 이남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것으로 사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19호인 삼층석탑은 극락보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탑의 높이는 2.9m로 1960년 3층 석탑의 정상부에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국보 제106호)이 발견돼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 삼층석탑이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하며 단아한 형태를 띠고 있다.

본래 운주산 속의 비암사에는 3개의 비상-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국보 제106호), 기축명 아미타불 비상(보물 제367호), 미륵보살반가사유 석상(보물 제368호)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들은 모두 1960년 9월에 발견·조사해 국보·보물로 지정,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석상이란 석비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을 말하는데 이러한 비상이 3개나 있어 '비암사'라는 사명이 붙게 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전면 하단에 14행 1행 4자의 주문을 비롯해 양 측면에 세자각명이 있다.

명문의 계유년은 신라문무왕대(661~680)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석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의 유력자인 전씨가 발원해 이룩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368호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석상은 비암사에서 발견된 3개의 비상 중 가장 작은 것으로 4면 모두 조각이 있으나 전면이 위주임은 다른 석상과 같다.

이들 보살입상이나 그 밑의 공양상이 모두 전면을 향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같은 점에서 전면의 반가상은 주존으로 삼아서 삼존형식을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이 있으며 그 위에 타원형의 탑신이 마련되고 다시 그 위로는 평판을 놓아 대소 삼주의 상수를 장식했다.

이 석상은 삼국시대에 유행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삼아 반가사유상 양식의 귀중한 유품으로 소형이기는 하나 손상이 없어 백제 연구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성년대는 각 부분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곳에서 함께 발견 조사된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과 같은 673년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멸망한 후 멀지 않은 시기에 조성된 이들 석상은 통일신라보다는 오히려 백제의 석조미술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지역적으로 보아 이 곳 연기군 일대가 백제고도 중에서도 공주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조성시기가 백제멸망 직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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