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많은 공동체가 발전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직분에 충실한 가운데 내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이 사회의 공동체에 구김살이 없어지고, 함께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김수장 (대전유성 출신 변호사·법무부 검찰인사委 위원장)
검찰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법무부 장관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인사기준과 원칙을 제시하는 법무부 검찰인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대전 유성 출신의 김수장 변호사다.

천안 출신의 김종구 법무부 장관에 이어 충청권 인사로서는 두번째로 서울지검 검사장을 지낸 바 있는 김 변호사의 소망은 의외로 소박했다.

김 변호사는 1945년에 현재 유성구청 뒤편에 있는 충남대학교 농대 근처, 당시 울산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동아일보 김성수 전 회장,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등이 울산 김씨다. 원래 울산 김씨는 전남 장성에 많이 살고 있으며, 태종 이방원 부인의 사촌 언니의 신랑되는 분이 중시조다.

김 변호사가 출생한 집성촌은 당시 소나무 숲이 울창했고, 야트막한 산도 있던 곳으로 조선 중종 때 처음 생겨 약 300년 이상 유지된 것으로 짐작되고, 당시에는 70∼80호가 있었던 것으로 김 변호사는 기억하고 있다.

"1973년도에 처음 검사로 임관했는데 당시 '대덕연구단지 조성 발전계획'이 나오면서 산이 깎이고, 집성촌도 개발되면서 80년대 초에 모두 근방으로 이주했습니다. 오랫동안 조상들이 살아왔고, 흔적도 곳곳에 배어 있는 곳에서 개발이란 명목으로 쫓겨났음에도 어른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김 변호사는 20여년 동안 개발을 진행해 왔으나 완성되지 못한 일본 쓰꾸바 공업연구단지와 10년 만에 완성된 대덕연구단지를 비교했고, 당시 박정희 정권이 연구단지 조성을 주도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자연스레 반발하지 않았던 이유가 풀렸다.

김 변호사가 유성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선생님은 계신데 교실이 없어서 묘지의 잔디밭에 흑판을 걸어놓고 공부를 하기도 했고,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수업을 한 적도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김 변호사는 그 학교에서 유일하게 대전중학교에 입학했고, 이어서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일어난 3·15 의거에서 실종됐던 김주열 군의 시체가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 바다에서 발견되고, 시위 학생들이 정치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촉발됐던 4·19 학생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그해 2월 28일에 대구경북고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데모를 시작했고,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아마 토요일 일겁니다. 당시 장 면 부통령이 대전에 유세를 오기로 했는데 학생들의 데모를 우려, 각 학교는 연장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지요. 그래도 학생들이 전부 일어나서 유세장으로 몰려가 데모를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김 변호사는 대전고 학생들의 이날 항의시위가 대구경북고 학생들의 시위보다 조금 빨랐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 2 때에는 운동시합 관계로 대전고생들이 대전공고생들을 집단 구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대전공고생들은 대전천에서 돌을 잔뜩 들고 대전고교 앞으로 몰려가 교실 등을 막론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 돌을 던졌고, 대전고생들은 학교 옥상에 올라가 상급생의 지휘에 따라서, 대전공고생들의 진입을 막아냈다.

이 사태는 학부모, 양측 학교 교사, 교육계 인사, 충남도지사(도지사가 대전 시장을 임명하던 시절)까지 나선 후, 양측 학생 대표가 만나 서로 사과를 함으로써 마무리됐다.

김 변호사는 당시 전국 학력경시대회의 선수로 선발될 정도로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대전고에서 한 해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에 100여명만이 진학하던 시기였다.

김 변호사가 서울대에 진학할 때는 30명이 들어갔으며, 그중 10명이 김 변호사와 함께 법대에 진학했고, 김 변호사와 이신섭 변호사 단 2명만이 사법시험을 패스했으나, 김 변호사가 동기 중에서는 제일 먼저 합격했다.

특히 이양희 국회의원은 중학교, 고등학교, 법대 친구로 오랜 인연을 맺어 왔는데 김 변호사는 "이 의원은 처음부터 정치에 뜻이 있어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하기는 했는데 법률공부는 별로 안한 것 같아요"라고 회고했다.

"제가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 유행가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공부를 했고, 대학 때는 방학 때마다 계룡산 갑사나 마곡사에 가서 공부를 했지요."

공부에 대해 잠시 발뺌하던 김 변호사는 잠시 미소를 지은 뒤 후배가 선물했다는 '대서양 문명사'라는 책을 읽고 있다며 소개를 했고, 전 세계의 역사를 아우를 수 있는 역사학자가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누구든 자기 직분에 매우 충실해야 하고, 반드시 내일이 있어야 합니다. 나 같은 법률가는 법을 많이 공부해야 하고, 기업가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며, 다른 직업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전문성을 살려야 합니다. 그 후 여유가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이 공동체가 구김살없이 함께 발전하게 되지요."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나 내실이 없으면 나눔이 적어지고, 단합이 깨지는 등 내외 요인에 의해 쉽게 허물어집니다. 그런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선례가 많죠."

김 변호사는 검사시절 이런 얘기를 후배 검사들에게 많이 들려줬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지난 93년 감사장으로 승진한 뒤 전주, 창원, 부산, 서울지검 검사장 등 검사장을 4번 지낸 바 있으며, 2000년에는 6년 임기의 중앙선관위 상임위원(국무위원급)으로 임명됐으나 업무에 비해 너무 많은 예우를 받는 것 같아 9개월 만에 그만뒀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7월부터 법무부 검찰인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인사위원회는 총 8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위원으로는 서울대 법대 안경환 학장, 박원순 변호사, 대검차장, 서울고검장, 부산지검장, 법무부 검찰국장 및 부장검사, 평검사 각 1명이 참여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위원장으로서 가능하면 많은 검사들이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인사기준과 원칙을 제시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고향에 대해 김 변호사는 "바쁘게 살 때는 깜박 잊기도 했었는데 조상 산소를 모신 곳, 친구, 선후배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곳, 한마디로 어머니 품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포근하고 편안해 진다"는 말로 그 정의를 대신했다.

김 변호사는 '내실'이 갖춰지면, 나고 자란 유성에 조그만 장학회를 만들어 운영할까 생각 중이라며 "실현될지는 모르겠다"고 겸손해 했다.??
? 김수장 변호사는 …
출생 1945년 대전 유성

학력 1962년 대전고졸, 1966년 서울대 법대 졸, 1969년 서울대 사법대학원 수료

경력 1967년 사법시험 합격(8회), 1969∼72년 육군 법무관, 1973∼78년 부산지검·마산지청·서울성북지청 검사, 1978∼82년 법무부 검찰2과·제주지검·법무부 보호과 검사, 1982년 대검 검찰연구관, 1983년 대구지검 특수부장, 1986년 인천지검 특수부장, 1987년 서울지검 특수2부장, 1988년 법무부 법무심의관, 1989년 대검 중앙수사부 1과장, 1990년 광주지검 순천지청장, 1991년 서울지검 서부지청 차장검사, 1992년 수원지검 차장검사, 1993년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장, 1993년 법무부 보호국장, 1995년 전주지검 검사장, 1997년 창원지검 검사장, 1997년 법무부 교정국장, 1998년 부산지검 검사장, 1999년 서울지검 검사장, 1999∼2000년 변호사 개업, 2000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2000∼200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2002년 변호사 개업(현), 2003년 검찰인사위원회 위원장(현)

상벌 홍조근정훈장??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