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윤기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지역이나 학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뭉치면서 세력을 이루게 된 집단을 붕당이라 한다. 사림파와 훈구파를 배경으로 시작돼 조선 선조 때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이 처음 생겨났는데, 처음에 붕당은 올바른 정치가 무엇인지 서로 묻고 답하면서 나랏일에 대해 토론과 견제를 하는 역할을 했고, 사상에 대해 토론하며 상대에게서 배우고, 서로 존중하는 집단이었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사건건 대립하기 시작했고, 명분과 원칙을 고수하면서 타협할 줄 모르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자신들의 학문적 견해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려고 시도하면서 점차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변질해 갔다.

이런 당쟁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 정조는 ‘나라가 큰 병을 앓은 사람처럼 원기가 빠진 상태’라고 진단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개혁이 시작되자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 세력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그들은 끊임없이 개혁 세력에 흠집을 내고, 개혁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면서 꿈이 조금씩 펼쳐지는 상황에서 건강했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고, 결국 개혁도 좌절되었다. 개혁에 기대를 걸고 있던 많은 백성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현실에 크게 실망을 하게 되었다.

최근 정부의 정책 중 세종시 건설,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연이어 과학비즈니스벨트, 동남권 신공항 등 굵직한 사업 추진과 관련해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마치 변질된 붕당의 세력 다툼 양상을 보는 듯하다. 저마다 목에 핏줄을 세우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조정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상대방을 생각해 주고, 존중해 주는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복마전은 작은 규모의 사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당장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충남대도 공주대, 공주교대와의 통합 논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수는 교수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집단마다 핏대를 올리고 있다. 대의는 없고 이기적인 명분만이 난무하고 있다. 한쪽은 상대방을 독단적 결정과 절차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의 독단과 절차 문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상대방의 얘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줄기차게 자신의 얘기만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는 형국이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상실한지 오래다. 흠집 내기가 난무하고 상대방 무너뜨리기가 난무하는 양상에서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사실도 아닌 카더라식 대화가 오가고 있다. 개혁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난 정조시대처럼 붕당의 변질된 행태로 인해 평온했던(?) 통합논의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지 모른다는 우울한 생각이 든다. 가장 민주적이고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대학에서 자기 주장만 외칠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할 수 있는 논의의 장으로 나와 다른 생각들을 들어보고 함께 결정하는 시민의식이 아쉽기만 하다.

피터 싱어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책에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보다는 대의와 타인을 생각하는 삶이 종국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온다고 말한 바 있다. 대의를 위하고 타인을 위하는 삶이 무엇인지 한번쯤은 고민해 보아야 할 때다. 나만 배부르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편안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없는지 조금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한 집단의 행복만 추구하는 삶이 전체와의 조화를 이루는 삶은 분명 아니다. 일상에서 어느 정도는 불편을 감수하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삶도 필요하다고 본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만을 위주로 어느 한쪽 방향만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개인적으로는 불편이 있겠지만, 미래 발전과 전체 조화를 위해, 그리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대의를 먼저 생각해야 할 때다. 그래야 대학이 살고, 지역이 살고, 대한민국이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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