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육 평생 외길 상아탑 새지평 '활짝'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대한민국 교육엔 무면허 사공이 너무 많다.
4800만 국민 누구나 연줄이 닿는 교육의 수장은 개각 때마다 경질되기 일쑤고, 바라보는 눈들은 당근보다 채찍질에 익숙하다.
대한민국 백년지대계의 초석을 다진 화곡 서명원(徐明源·83) 박사는 옛 시절을 회고하기에 앞서 이처럼 우려 섞인 쓴소리를 토했다.
이화여대, 서울대 등 내로라하는 상아탑의 선봉에서 대학 교육의 새 지평을 활짝 열고 충남대를 명문궤도로 진입시킨 장본인.
4·19 혁명기 문교부차관으로 생경한 열린 교육을 시도했으며, 혜안과 경륜을 담보한 교육부장관으로 교육을 설계한 서 박사는 한사코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자로, 교육행정가로 일평생을 헌신한 그의 이야기는 서슬 퍼런 일제하의 학도지원병 거부 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

그가 경성제대에 입학한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 전쟁을 준비하며 대대적인 징병에 혈안이 돼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징병의 의무가 없었던 당시 일본은 '황국신민의 이름으로 지원 자격을 부여한다'는 적반하장격의 명분을 앞세웠다.

경성제대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조선 학생들은 지원을 거부했고, 간특한 회유가 수포로 돌아가자 일본은 목숨과 가족을 위협하며 총알받이를 강요했다.

서재필 박사의 후예(서재필 박사는 그의 재종조부다)답게 그는 공갈에 못이긴 부모의 입대 권유 속내마저 무시한 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불량학생이라는 죄목으로 제명당하고 만다.

"결국 징용공으로 징집돼 해주 용담포 시멘트 공장으로 배치됐습니다. 일본에 협력하면 우리 겨레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지 않습니까. 블랙리스트에 올라 목숨을 장담할 수 없던 처지였던지라 폐병을 핑계삼아 귀향을 했습니다. 사회주의에 심취한 교우를 둔 덕분에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구요."

8·15 해방으로 그에게 씌워진 멍에도 벗을 수 있었다.

논산 구자곡(현 연무읍) 출생인 서 박사는 어릴 적부터 소문난 공부벌레였다.

그러나 날고 기는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성제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금말로는 재수지요. 보습과인 경기고등학교 6학년에 입학했습니다. 전교생의 2/3가 일본인이었고 나머지의 대부분을 제일고보(경기중)가 차지할 정도로 바늘구멍이었거든요. 충청도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공주고보에서도 가뭄에 콩나듯 합격했을 정도였습니다."

서 박사의 경성제대 재학시절 전공은 심리학, 자칫 교육계의 거목이 생성되기도 전에 고사할 뻔한 일이지만 애초 그의 꿈은 정신과 의사였다.

대학졸업 후 이화여대 강단에 섰던 그는 1949년 GARIOA(일명 캔디 장학금)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 최고 권위의 교육학을 자랑하던 Peabody대학에서 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사과정에서 교육학으로 전과했다.

고국이 전쟁의 화염에 휩싸인 시기, 유학이 그리 순탄할 리 만무했다.

석사학위를 마쳤을 무렵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생각다 못해 재종조부 서재필 박사에게 서신을 띄웠지만 회답은 뜻밖이었다.

"나라가 어렵고 석사학위면 충분하니 돌아가 제자를 양성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담임교수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고국에서 교육을 재건하는 것이 더 큰 애국이라며 지원 약속과 함께 발목을 잡더군요."

전무후무한 해외파 교육학 박사는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모교인 서울사대에서 러브콜을 받았지만 1년만 도와달라는 김활란 총장의 간곡한 권유를 못 이겨 이화여대에 첫 발을 내디뎠다.

35살의 서 박사는 학장서리에 교육과 과장, 부속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정신위생,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육, 평생교육은 그 당시 그가 풀어낸 보따리 중 한국 최초로 손색이 없었다.

"처음 이대에서 정신위생을 강의하려 하니 학생들 사이에서 별 강의가 다 있다는 핀잔이 나오더군요. 그만큼 교육학에 대한 인식이 뒤떨어져 있던 시절이라는 얘기지요."

지난 57년 모교인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교무처장, 총장 서리, 사범대 학장, 부총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관악캠퍼스 시대를 개척했다.

60년 민주당 시절 그는 내각 중 유일한 비정치인 출신인 오천석 박사와 호흡을 맞추며 문교부차관직을 수행했다.

그는 교육현장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주력했고, 부하직원들의 식견을 존중해 정책구상과 행정에 반영시켰다.
교육의 질적 향상은 교원의 질적 향상이 근본이 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교사재교육의 기회를 대폭 확대하는 등 교육의 민주화를 실현시킨 차관으로 유명하다.

굽힐 줄 모르는 지조와 청렴함은 숙명여대와의 짧은 인연에서 엿볼 수 있다.

사사건건 간섭하며 소위 '바지 총장'으로 앉히려는 속셈에 반발해 결국 3주 만에 짐을 싸버렸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제2의 서울대를 만들라는 엄명을 받고 충남대 총장으로 부임한 것은 지난 77년의 일이다.

금의환향한 그는 160만평 확보운동을 전개하며 충남대의 궁동 이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취임사에서 영광보다는 대학이전사업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통감한다고 했을 정도로 그의 캠퍼스 이전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특히 대학의 심장부인 도서관은 그 스스로 가장 만족하는 작품.

외유내강형의 총장은 정부를 속여가며 태양의 기운을 받는 캠퍼스 정중앙에 대규모 도서관을 건립했고, 앞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별 필요 없던 주차장을 늘려 잡았다.

투명하고 지역출신을 배려한 인사도 그의 올곧은 신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임기 8개월의 교육부장관은 뜻과 소신을 펴기에는 그리 길지 못했다.

그는 워낙 많은 감투를 쓴 덕분에 학문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교육자보다는 교육행정가로서 살아왔다는 겸손의 뜻일 것이다.

"충청도 사람이라 그런지 자주 망설입니다. 이제 내 인생을 마무리하는 일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학문의 결실도 맺어야 하고 지난 시간을 회고해 봐야 할 때니까요."

그의 제자들이 모두 대학총장을 물러났을 만큼 세월은 흘러버렸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교육에 대한 그의 발자취는 곳곳에서 선연하게 그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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