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상공회의소(1) 일제하 태동

▲ 1938년 건립 당시의 대전상공회의소

대전은 경부선 철도 경유지 확정, 호남선 철도 분기점 결정, 도청 소재지 이전 등을 거치면서 생성과 발전을 거듭했으며, 그 역사의 흐름 한가운데 대전상공회의소가 자리하고 있다.

고속철 개통과 신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으로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이때에 74주년을 맞는 대전상공회의소의 출범에서부터 오늘까지 그 뒷이야기를 추적함으로써 새 시대 대전을 준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코자 한다. /편집자

3·1절을 맞아 되돌아보게 되는 대전의 역사가 역설적이듯 대전상공회의소의 역사도 그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대전은 일제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생성과 발전을 거듭한 일본의 도시였고, 대전상공회의소도 그 역사적 산물로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전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부임하게 될 후지히라 헤이(富士平平)가 조선에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고향인 히로시마를 떠난 것은 1903년.

▲ 1920년 대전 중심가.
서울(당시 경성)에서 목재상을 경영하며 조선 진출에 흡족해하던 그가 다시 대전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한일병합을 1년여 앞둔 1909년이다.

경부선 철도의 중심 경유지로 떠오른 대전이 호남선 철도의 분기점으로 결정되자 후지히라는 대전의 목재 수요가 팽창할 것을 예견하고, 전격적인 대전 이주를 단행한다.

그의 판단은 그대로 적중, 대전이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 떠오른데다 각종 공사가 계속돼 그가 운영하는 목재상은 해마다 번창했고, 토지·가옥 등 부동산 투자에도 성공, 후에는 일왕이 주재하는 연회에 초대될 정도로 거부가 됐다.

대전 경제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그는 대전상의 설립과 함께 초대회장, 2대 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대전에서 가장 성공했던 상공인 중 하나였던 후지히라와 마찬가지로 대전은 '코리언 드림'을 꿈꾸는 일본인들이 급격하게 몰려들면서 팽창을 거듭했지만, 그 시대적 배경에는 철도 부설이란 우연이 크게 작용했다.

조선 식민지 수탈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경부선 철도 부설을 추진해 온 일제는 1892년부터 세 차례나 은밀하게 실측조사단을 파견했지만, 이들은 모두 대전을 경유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1900년 네 번째 답사단이 대전을 경유지로 채택했지만 보다 면밀한 조사를 위해 최종 결정이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03년 러일전쟁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경부선 철도에 대한 속성공사 필요성이 대두됐다. 일제는 직선로로 철도 부설에 나서야 했고, 이 때문에 대전이 경유지로 최종 채택될 수 있었다. 일본의 철도 부설에 비해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없는 상태에서 싸워야 했던 러시아는 육전과 해전에서 모두 패배를 거듭했다.이때부터 허허벌판에 일본인 청부업자와 공사 인부, 이들을 대상으로 생활용품을 거래하려는 상인들이 몰려들어 마을이 형성됐고, 잡초와 갈대가 무성했던 대전천변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눌러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후지히라와 같은 목적으로 대전에 몰려든 일본인이 한일병합 1년 전인 1909년 2487명에 이르렀고, 바로 그해 조선정부 주도로 설치하려던 경목선(서울∼목포) 철도 부설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가 호남선 철도 분기점을 대전으로 결정했다. 당시 대전과 조치원간 일본인 거류민들의 치열한 분기점 유치 경쟁이 벌어졌으나 수적 우위를 앞세운 대전이 최종 승리한 것이다.

후지히라 외에도 대전의 주요 상공인으로는 대전상의 3대 회장을 지낸 난부 쿄우헤이(南部京平)와 요시하라 히데쿠마(吉原秀態) 등 일본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으며, 대전상의는 출범 후에도 조선인 상공인들에게는 3명에게만 회원자격이 부여됐을 뿐이었다.

서울에 정착하다 이주한 후지히라와 달리 대전상의 초대 부회장, 3대 회장을 지낸 난부는 경부선 착공 무렵, 곧장 대전에 정착, 철도 부설과 국토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대전이 물류집적지로 부상하면서 굴지의 무역상이 된 인물이다. 그가 3층으로 신축한 남부상점 사옥은 번창하는 사세의 상징이 될 정도였다.

임기 중에 사임한 난부의 뒤를 이어 회장에 추대된 요시하라도 대전건설기에 목재상으로 자본을 축적, '7번자동차주식회사'와 '대전물산주식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대전 재계의 중진이었다.

이처럼 대전이 충남·북의 중심에 위치한데다가 경부선의 중심 기점, 호남선의 분기점으로서 남도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되자 1920년에는 대전읍의 인구가 조선인 7424명, 일본인 5239명 등으로 특히 일본인의 수가 많아졌다. 일본 상공인들이 부의 축적을 위해 대전으로 몰려들면서 대전군에는 일본인이 8807명이나 됐던 반면, 당시 충남의 도청 소재지였던 공주군에는 일본인이 논산군의 절반 수준인 1565명에 불과했다.

공주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던 대전 일본 거류민들은 자연스럽게 도청 이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공주읍민들의 거센 반발과 저지운동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기울어 조선총독은 기어코 도청 이전을 선언했다. 1927년 일본 상공인들이 주축이 된 대전실업협회가 조선총독부에 대전상의 인가신청서를 냈지만 뚜렷한 이유없이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상황에서 우선 도청 이전을 추진할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도청 이전에는 일본 경제인들의 뚜렷한 목적의식이 그 내막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대전상의 인가를 4년이나 미루다 결국 인가신청서를 반려하자 대전실업협회 회원 182명은 1932년 6월 18일 대전금융조합 2층에서 총회를 열고 새 법령인 조선상공회의소령에 입각한 대전상의 설립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날은 대전상의의 설립기념일이기도 하다. 이에 대전실업협회는 1933년 7월 7일 조선총독부에 인가신청서를 재차 제출하고, 1933년 11월 2일 인가가 떨어짐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대전에 상공회의소가 탄생하게 됐다.

이렇듯 대전은 러일전쟁을 위한 속성공사 와중에 경부선의 중심 기점으로 태생했으며, 일본 상공인들의 정착과 실익추구를 통해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당연히 일제치하 대전의 성장은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 조선인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철저하게 일본인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당시 대전에 세워진 금융기관, 회사, 시장 등도 모두가 일인들이 도시 경제권을 장악하고 수익을 독점하려는 의도에서 세워진 기업들뿐이었다.

김주일 대전상공회의소 회장은 "대전과 대전상의는 일제라는 암울한 역사적 배경속에서 철도 중심지로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며 "고속철 개통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 대전상의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계기로 지역 상공인과 시민 모두가 대전의 비약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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