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喪服문제까지 목숨걸고 싸웠던
양반정신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學界·言論등 새해의 화두로 끌고가자

전라도 사람은 돈이 생기면 맛있는 음식을 해먹는다고 한다. 경상도 사람은 집을 고친다는 것. 그러면 충청도 사람은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할까?

충청도는 제일먼저 의관(衣冠)을 장만하는 것이다. 도포나 머리에 쓰는 갓. 다시 말해 체면을 중시하는 것이다. 어느 관광지 대중목욕탕에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자 재빨리 알몸으로 문을 박차고 나와 뛰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뛰어 나가면서 옷을 입었다. 이런 사람들은 살았다.

그러나 소방관이 뒤늦게 뛰어 들어가 보니 옷을 입다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어느 도 출신일까?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체면치레에 비중을 둔 충청도 사람이다. 이것이 곧 선비정신, 양반문화의 하나다.

경상도 사람이 집을 고치는 것은 실용성(實用性)을 중시한다는 뜻일테고 전라도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해먹는다는 것은 삶의 여유를 말하는 것 같다. 대원군은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3대 적폐(積弊)로 전라도 아전, 평양 기생, 충청도 양반을 꼽았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충청도 서원이 가장 많이 문을 닫았음을 생각하면 역시 그의 눈에도 충청도 양반정신은 매우 부정적이였던것 같다. 서양에서는 기사도(騎士道), 일본은 사무라이(武士)정신, 중국은 중화(中華)사상이 원동력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선비정신이었고 양반정신이었다.

조선왕조를 몰락의 길로 이끈 것처럼 인식된 예송(禮訟)도 따지고 보면 나라를 유지하는 법통의 논쟁이었다. 가령 효종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그 어머니 조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하느냐, 1년복을 입어야 하느냐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목숨을 건 논쟁이 벌어졌다.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은 성리학(性理學) 사상에 의해 원칙적으로 예(禮)는 같아야 한다는 이른바 '天不同禮'에 따라 조대비는 효종이 적장자(嫡長子)로서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3년복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까짓 상복을 3년이면 어떻고 1년이면 어떠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뒤에는 왕위 계승, 곧 정권의 향배가 갈리는 폭발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양반정신은 명분을 생명처럼 여겼기에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이 탄생할 수 있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충청도 사람이 있었다. 이순신, 한용운, 윤봉길, 유관순, 김좌진, 이상재…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충신열사가 이어진 것도 이런 정신적 풍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충청도 하면 으레 뒤따르는 수식어 '양반'의 대명사가 지금은 경상도로 넘어간 인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동 하회(河回)마을.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 유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대작들을 배출했지만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 전통적인 한국 양반가옥을 보고 싶어 했을 때 이곳 하회마을을 보여줄 정도로 옛 고택들이 잘 보존되었고 2010년 8월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까지 했다.

우리 전통 양반의 제례(祭禮)와 예절역시 안동에 가야 볼 수 있는 것으로 되어있고 외국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다. 정말 충청도는 양반자리마저 넘겨주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다 대형 숙원사업들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신세로 전락한 충청도. 그 양반정신이 시대에 안맞기 때문일까? 그렇게 세(勢)를 이룰 에너지가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새로운 양반정신을 모색하는 운동을 벌이자. 돈이 생기면 의관도 장만하고 집도 고치는 정신…. 학계, 언론계, 사회단체가 새해의 화두로 끌고 가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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