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將을 원숭이 같다며 전쟁은 없다한
임진란 때의 당파적 편견…
우리는 연평도사태 어떻게 보고 있나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전황이 위급한 상황인데도 선조임금에게 바둑을 두자고 제안했다. 이여송이 오만한 마음에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인데 선조는 마지못해 대국에 응했다. 이때 영의정이었던 유성룡(柳成龍·호 西厓)이 임금을 가린 우산에 구멍을 뚫고 훈수를 하여 이여송이 손을 들게 만들었다.

유성룡은 뛰어난 지도자로서의 모습도 갖추고 있었다. 1591년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을 등용한 것이 그것이다. 특히 이순신을 육군에서 해군 장수로 7단계 뛰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시켰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유성룡의 가장 큰 공훈은 '육군 이순신'을 '해군 장수'로 등용시켜 1592년 임진란 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나라를 구한 것은 이순신장군이었지만 '이순신'을 있게 한 것은 정치인 유성룡이었다. 그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1597년 구국의 영웅으로 이순신에게 민심이 쏠리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간신들이 모함을 하고 임금을 부추겨 사형에 처할 위기로 몰아넣은 것도 정치인들.

만약 그때 이순신이 처형됐다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이 위기에서 이순신을 구해 낸 것도 정치인이었다. 우의정 정탁(鄭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백의종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이 전쟁이 끝나고 닥쳐올 당쟁의 회오리 속에 희생당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한 것이었다면 역시 정치가 그를 죽였다. 그렇듯 나라를 구할 인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게 정치다.

그러면 그 정치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100% 사심 없는 눈을 갖는 것이다. 당파적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지 않고 나라만 생각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黃允吉)은 곧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보고했고 그와 당이 달랐던 김성일(金誠一)은 풍신수길의 생김새가 원숭이 같아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선조임금은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한 김성일의 보고가 마음에 들어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전쟁을 경고한 서인들은 귀양 보냈다. 이렇듯 국가적 위기를 보는 눈이 당파에 따라 다르고 지도자가 듣기 좋은 말에 안주하면 나라는 거덜나고 만다.

이번 연평도의 북한군 도발에 임하는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과연 당파적 편견을 초월해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가?

물론 천안함 폭침에 이어 연평도 사태에서 보여준 우리의 관료화된 군대. 상황발표가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국민을 헷갈리게 만드는 안보 책임자들에게서 국민은 신뢰를 보낼 수 없었고 그래서 미국 함대가 서해훈련을 마치고 떠나자 다시 불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군을 믿지 못하겠다는 질책만 할 게 아니라 정치인들의 신뢰를 잃는 것이 더 무섭다.

연평도를 방문해 포격당한 보온병을 들고 몇 ㎜ 포탄이라고 카메라 앞에서 실수를 하는 정치지도자들에게 믿음이 가겠는가?

포연에 그슬린 술병을 들고 '폭탄주'라며 유머스런 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정치인, 그 와중에 자신들의 세비를 슬쩍 올리고 주먹다짐과 아우성속에 새해예산을 통과시킨 국회, 이렇게 해서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을까? 우산에 구멍이라도 뚫어 임금 앞에 이여송의 무릎을 꿇게 한 유성룡 같은 지도자, 육군 이순신을 해군 장수로 만든 그런 혜안의 정치인이 우리에게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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