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정세 대처못한 의자왕,
임진왜란, 6·25전란 중에도 당파싸움만 한 정치인들 새겨들어야

660년 7월 18일(음력), 백제 최후의 임금 의자왕은 피신해 있던 웅진성(지금의 공주 공산성)에서 나와 당나라 군사에 항복을 했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왕도 사비성(부여)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웅진성에 들어 온지 불과 5일만의 항복이었다. 나당연합군의 본격적인 공격도 없었고 또 웅진성은 워낙 전략적 요충지여서 더 버티어 낼 수 있었는데도 쉽게 백기를 든 것이다. 더욱 가까운 임존성(예산)에는 백제가 망하고도 3년간이나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아 낼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항복을 한게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의자왕은 멸망 5년 전 까지도 신라의 30여 성을 빼앗는가 하면 신라의 존립을 위기로 몰아넣는 등 용맹함과 기개가 넘쳤던 임금이 아닌가.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두 가지 가설을 내 놓는다. 하나는 계백장군 마저 잃어버린 만큼 전세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체념해버린 것. 두 번째는 의자왕이 피신해 있던 웅진성의 방위사령관 이식(또는 예식으로 되어있는 기록도 있음) 의 배반설이다.

학자들은 '구당서' 소정방편에서 '이식이 의자왕을 데려와서 항복했다'는 구절에 유의하고 있다. '데려왔다'는 것은 의자왕은 오지 않으려 했는데 반 강제적으로 성사시켰다는 뜻.

즉, 항복주체는 이식이라는 배반자였고 그래서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 대장군까지 오르며 영화를 누렸음이 그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식이 왕에게 항복하라 하니 왕이 칼로 자기 동맥을 끊으려 했다고도 전해진다. 의자왕답게 자결을 시도한 것이다.

여러 상황을 종합할 때 신하에 배신당해 의자왕은 붙잡힌 것이지 스스로 쉽게 항복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7월 29일 의자왕은 신라 무열왕과 당나라 소정방 앞에서 항복의 의식을 거행했다. 의자왕은 태자 융과 함께 단하에 꿇어 앉아 단상의 정복자들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데 이를 지켜본 백제의 신료들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8월 17일(양력 9월 24일) 귀족 88명을 비롯 1만 2000여 명의 백제인들과 함께 의자왕은 배에 실려 당나라 낙양성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자유인이 되었으나 곧 죽고 말았다. 참으로 비극적인 최후였다.

눈을 감기전 의자왕은 사무치는 회한에 젖었을 것이다. 적이 코앞에 밀려오는데도 '당나라군은 백강에서 막고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으라'는 충성스런 신하의 소리를 내편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고, 전투의 우선순위를 놓고도 패가 갈려 국론분열을 일으킨 것. 그것이 결국 백제를 망하게 했음을.

그렇게 하여 뒤늦게 계백장군이 장렬히 싸웠으나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국론분열 속에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당나라는 고구려 견제를 위해 신라가 필요했고, 신라는 백제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위해 전략적으로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외교전을 전개했는데 백제는 동북아시아의 정세파악에 둔감했고 자만에 빠졌음을….

백제가 망하고 나서도 우리의 지도자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 숨막히는 전화속에서 당쟁으로 분열하여 피를 흘렸고, 6·25때는 국토의 대부분을 인민군에 빼앗기고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위기 속에서도 부산 정치파동을 겪는 등 당파싸움을 계속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9월 24일, 이날은 1350년 전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간 날, 우리는 의자왕의 그 회한을 되씹어 봐야한다. 우리 정치의 DNA를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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