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시댁외조가 가장 큰 버팀목"

▲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
"난 시집을 잘 간 것 같아. 물론 장관이 되기까지 고향 선후배님들이 많이 도와 주시기도 하셨지만…."

언제나 차분하고 자상하지만, 화사한 미소로 상대방을 사로잡는 실력파 여성 장관. 그가 논산 출신의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그런 김 장관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레퍼토리의 결론은 늘 '시댁 자랑'이다. 주변 사람들은 또 그 소리냐며 지청구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에 김 장관도 진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짓는 것이리라.

김 장관은 1945년 충남 논산시 화지동 41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창초교, 강경여중을 졸업할 때까지 김 장관의 집안은 지역에서 잘나가는 유지였기에 출발은 그만큼 화려했다. 아버님은 논산읍에서 '아이스께끼' 공장을 여러 군데 운영하셨고, 근처 논산훈련소 급양대에 먹거리를 전부 납품하는 일까지 맡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역에 있는 학교의 학생복을 도맡아 만들어 팔고, 옷감도 팔았다. 따라서 김 장관의 집안에는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 '언니'들이 많았고, 이들과 먹고 자며 같이 생활했다.

제일 먼저 본 영화는 '자유 부인', 즐겨 부르는 노래는 '낭랑 18세', '전선의 봄', '단장의 미아리 고개', 즐겨 봤던 소설은 '애인', '아리랑', '려원' 등 3류 여성잡지. 초등학교 때 김 장관이 언니들과 함께 어울려 다닌 결과다. 한번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노래를 시켰는데, 부르는 노래마다 유행가여서 선생님이 부모님을 소환(?)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공부는 잘했어. 교과서는 중학교 올라가서부터 보기 시작했지만 말이야."
사실 김 장관은 당시 지역에서 알아주던 부창초등학교를 다녔고, 거기서 단 3명만이 강경여중에 진학했는데 그중에 한 명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보니까 강경읍에 소재하고 있던 중앙초등학교 애들이 판치는 거야. 그래서 셋이서 열심히 공부했고, 전교 1, 2, 3등을 거의 우리들이 석권했지. 얘들은 경기여고, 이화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가정대학을 졸업한 뒤 각각 시집가서 잘살고 있어. 가정대학 가는 이유가 시집 잘 가려는 거 아니겠어."

대전여고에 진학한 김 장관은 또다시 학교 텃새에 눌렸다. 이번엔 혼자였다.

"전체 6반 중에 12등을 했고, 선생님이 부반장으로 나를 발표했지. 근데 한 친구가 손을 들더니 선거로 결정하재. 그러더니 나를 떨어뜨리는 거야."

그래서 김 장관은 고 3 때까지 반장, 부반장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된 데는 집안이 몰락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하나의 사업이 무너지니, 다른 사업들도 일제히 무너지더군. 논도 다 뺏기고, 집과 집안 물건마다 압류 딱지가 붙었지. 이모네 집으로 쫓겨 갔던 난 엄마한테 공부 그만두고 장사나 해야겠다고 했어."

엄마는 "너네들 공부시키는 게 내 유일한 희망"이라면서 패물을 팔아 학비를 댔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 장관은 매달 전교에서 10등 안에 들었고, 예비고사에서는 전교 2등을 차지했다.

선생님과의 진학 상담. 김 장관은 이화여대 약대 진학 권유를 거부하고, 서울대 간호학과로 결정했다. 간호대학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취직을 100% 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하고, 힘들게 살아 왔기 때문에 힘들게 사는 사람을 위해 봉사를 하고 싶다는 게 간호학과를 고집했던 이유였다.

"근데 말이지, 꼴찌에서 3번째로 과에 합격한 거야. 한 달 내내 출석을 성적순으로 부르는데 어찌나 챙피하던지…. 지금도 1등과 꼴찌는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어."

집안이 풍비박산 난 상황에서 아버지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장학금이 필요해 김 장관은 공부에 매진했다.

그럼에도 대학 4년 동안 농촌봉사활동을 했고, 낙산 천막학교(현 낙산가든)에서 구두닦이, 거지들을 모아 밤마다 수학과 국어를 가르쳤다.

김 장관이 남편 고현석 곡성군수를 만난 계기도 농민운동 때문이었다. 남편은 당시 서울대 법대를 다니면서 고시를 포기한 채 농민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향토 개척단'이라는 모임에 각 대학 대표로 참석하는 자리에 김 장관이 참석했을 때, 남편은 단장을 막 끝낸 상태였다.
"고 군수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괜찮아 보여서 먼저 말을 걸었어. 민족, 분단 등 사회 문제를 얘기하면서 점점 연애를 하게 됐지. 내가 좋아서 그 사람을 쫓아 다녔다면 사람들이 안 믿어."

김 장관은 대학을 졸업(67년)한 뒤 서울대 병원에서 3년간 근무했고, 결혼은 69년도에 했다. 70년대 후반에는 딸 셋 둔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김 장관은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딸 하나는 등에 업고, 애기 두 명을 양 손에 한 명씩 쥔 채 남편이 공항까지 마중 나와 나를 떠나 보내는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

고 군수는 당시 "아내는 살림만 할 사람이 아니다"라며 앞장서서 친척들을 설득했고,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육아를 기꺼이 맡아 주셨다. 1년에 제사가 10번이나 되는 엄격한 집안에서 맏며느리를 유학 보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기에 남편의 도움은 컸고, "시집 잘 갔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김 장관이 늘 고민하는 3가지는 '대의', '덕', '바른 길'이다.

"90년도 초반부터 '대의'라는 게 뭘까 항상 생각했고, 지도자, 장관이 가질 덕목, 가야 할 길, 그리고 대의에 의한 결정은 뭘까 항상 고민해 왔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내가 가야 할 원칙', '사람이 해야 할 기본'을 먼저 묻고, 선택을 해 왔는데 당시에는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은 성공과 맞물리더라고."

곡성에서 서울을 오가는 여정에서, 고향을 지나칠 때는 어느샌가 깨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산천을 눈과 가슴에 담아 두는 김 장관.

"화지동 옆에 냇물이 보이고, 좀 더 가면 공주로 가는 샛강이 흐르지. 오른쪽은 우리 동네, 왼쪽은 부창초등학교, 좀 더 가면 강경여중이 보이고…." 김 장관의 화사한 미소 속에는 고향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내재돼 있었다.??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은…

▲1945년 1월 3일생 ▲1963년 대전여고 졸 ▲1967년 서울대 간호학과 졸 ▲1971년 동 보건대학원 보건학과 졸 ▲1980년 미국 콜롬비아대 대학원 간호교육학과 졸 ▲1984년 보건학 박사(서울대) ▲1967∼69년 서울대병원 간호사·수간호사 ▲1971∼2000년 서울대 보건학과 조교·전임강사·부교수·교수 ▲ 1984년 대한간호협회 이사 ▲1986년 지역사회간호학회 초대회장▲199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가정간호자문위원, 91년 산업간호학회 초대회장 ▲1993년 노동부 산업안전보건대상 심사위원 ▲1994년 한국산업간호협회 초대회장 ▲1995년 환경운동연합 전문위원, 96년 한국학교보건학회장, 98∼2002년 대한간호협회장, 98년 제2의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 99년 여성정책개발원장, ▲2000∼2003년 16대 국회의원(전국 승계, 새천년민주당) ▲2000년 새천년민주당 총재특보 ▲2001년 새천년민주당 원내부총무 ▲ 2002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부의장 ▲ 2003년 보건복지부 장관(현)

[저서] '지역사회간호학', '학교보건과 간호', '학교양호실무', '지역사회간호학'(공저) '산업간호학', '대학생의 건강관리', '선생님의 건강증진', '건강한 부부관계를 엮는 작은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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