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꼭 1000년 전의 일이다.

고려 현종이 1010년 목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는데 거란이 이를 문제 삼아 황제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공해 왔다. 특히 거란은 목종을 살해한 고려의 강조를 응징하겠다는 이유였는데 그것은 명분이었고 당시 중국 송(宋)과의 관계 등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었다.

어쨌든 다급해진 현종은 전라도 나주로 피란을 갔다가 그 지방 세력가들로부터 많은 수모를 겪었다.

정면에서 야유를 받기도 하고 삼례역에서는 전주절도사가 전주에 유숙하라는 등 감히 왕에게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하긴 왕을 직접 시중하던 관리까지 도망치는 상황이었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현종이 정당하게 왕위에 오르지 못한데 대한 도덕적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현종은 이렇게 모욕을 겪다가 공주에 이르러 정반대의 환대를 받게 된다. 공주 절도사 김은부(金銀傅)가 깎듯한 예를 갖추어 현종을 맞이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장녀로 하여금 임금의 옷을 기워드리게 하고 음식도 정성껏 올렸다. 그러자 현종은 절도사 김은부의 장녀를 왕비로 맞아 들였다. 원성왕후(元成王后)가 바로 그녀다.

마침 전쟁도 끝나 왕은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김은부 절도사의 나머지 두 딸도 다 왕비로 맞아 들였다. 그러니까 세 딸을 모두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이니 그 전에도, 후에도 없는 일이다.

나라가 존망의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쫓기는 임금이 왕비를, 그것도 셋을 맞이하다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그것이 공주에서 일어났다. 물론 절도사 김은부는 공주 사람도 아니고 왕이 공주를 떠난 후 곧 중앙관서의 고위직으로 올라갔으니 딸 덕을 본 것일까?

현종은 왜 이렇게 한 신하의 딸을 몽땅 왕비로 삼았을까? 그만큼 아름다움에 반했을까? 아니면 공주지역의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거나 김은부의 개인적 세력을 잡기 위한 정략적인 것이었을까? 어느 시대나 권력을 잡기위한 전략은 있었던 것.

그것도 쫓겨 다니는 상황에서 그리고 겨우 개경으로 환궁하자마자…

공주로 피난을 왔던 임금은 또 있다. 1624년 2월 8일 이괄의 난 때의 인조임금. 인조역시 공주산성에 머물러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렸는데 마침 그곳에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어 임금은 시간만 있으면 그 나무에 기대어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한양(서울)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하루는 이 나무에 두 팔을 벌리고 역시 서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금은 너무 기뻐 이 나무(雙樹)에 금대를 두르고 3품 통정대부의 작호를 내렸다.

지금도 쌍수정 주변의 우거진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는 그때의 참담한 인조의 심금이 되살아 나는 듯 하며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금강은 지나 온 역사를 증언하는 듯하다.

이렇듯 가슴 저린 역사의 사연들이 흐르는 금강과 공산성 - 그런뜻에서 공주에 뜻있는 분들이 현종 피란 1000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기로 한 것 등은 공감이 가는 일이다.

역사는 영웅의 이야기만 있는것도 아니고 패배의 비극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후세에 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주뿐 아니라 우리 충남 곳곳에 숨어있는 이와 같은 스토리텔링을 개발하자는 것 - 그것이 관광자원이 될 뿐아니라 향토의 전통성을 살려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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