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중촌동 1번지에 있던 대전형무소(교도소)는 특별히 애국지사들을 수감했던 곳이다. 그중에서도 옥고를 치른 대표적인 인물이 안창호(安昌浩)선생.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선생, 그밖에 상해임시정부 의정원(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창숙(金昌淑)선생... 등등.

그런데 이곳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최소한 독립운동가들이 복역하던 특별동 만이라도 그대로 보존했다면 후세들에게 생생한 교육현장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올해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00주년이 되는 해 - 그 상처를 생생히 느낄 수 있을 텐데.

요즘 곧 홍성으로 떠나게 될 충남도청과 지사관사 활용에 대한 문화관광부의 다음달 용역보고를 앞두고 관심이 높다. 그런데 충남지사관사와 도청은 중앙청과 좀 다르다. 헐려진 중앙청이 100% 일본통치의 상징이었다면 이곳은 거기에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혼합돼 있다는 것. 그 첫째가 이승만대통령이 6.25때 8일동안 충남지사관사가 임시대통령관저로서 위기에 몰려 풍전등화 같은 국가운명의 고비를 겪은 곳이고 두 번째는 충남도청이 임시 중앙청이었고 또한 국회의사당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대통령이 대전으로 피란 온 것은 1950년 6월 27일 오후4시.

대통령이 대전으로 온 것은 극비에 붙여졌고 오히려 아직도 서울에 있는 것처럼 육성으로 대전방송을 통해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적은 곧 퇴각할 것이니 국민들은 생업에 열심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믿고 한강을 건너려던 서울 시민들이 뒤돌아 갔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7월 1일, 대통령은 정부의 대전이전을 공식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충남도청은 임시 중앙청사가 되어 각 국장실은 장관실이 되었고 지금의 2층 대회의실은 국회의사당이 되었다. 국정도 제대로 집행되어'북한이 처들어오면 즉시 반격을 하여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라'고 허풍을 떨다 망신을 당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해임되고 정일권(전 국무총리)준장이 승진하여 새 총장이 된 것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미군과의 작전 및 지위를 규정한 '대전협정'이 맺어 지기도 했고 UN과의 쉴 새 없는 교섭과 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무초 미대사가 이대통령을 찾아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자고 제의를 하자'그러면 나는 그들부터 쫓아내겠다'며 단호히 거절한 곳도 지금의 지사관사다. 7월 1일과 4일에는 도청 대회의실에서 신익희(申翼熙)국회의장이 국회를 소집했는데 과반수도 안되는 191명중 84명만 참석, 간담회 형식으로 회의가 이루어졌다. 간담회지만 이승만대통령도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국회의원들로부터 서울시민을 속여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대통령의 담화를 문제 삼아 대통령의 사과를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7월 4일 대전을 떠났지만 정부는 7월 16일까지 충남도청에 머물러있었고 조병옥박사가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런 역사 깊은 사연으로 충남도청과 도지사관사가 등록문화재 18호로 되어있어 이것을 철거하거나 변경하려면 문화재심의위원회 심의와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현상허가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이것을 철거하여 녹지공원을 만드느니 어린이 집을 만드느니 하는 것은 안타깝다. 차라리 이곳을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박물관이나 도서관, 과학관 등으로 사용하면 우리의 피눈물 어린 민족역사도 전수하면서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러사람의 중지를 모을 위원회가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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