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의 너른 가슴엔 한없이 솟아나는 샘물이…

분침과 초침의 새근거림이 천둥소리 마냥 들리면 여지없이 오전 11시30분, 무안한 엉덩이 두어번 들썩이며 위로 아래로 눈치를 살피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음질쳤다.

탯줄 내주신 어머니에게 생명 줄 대드린 뒤에야 토해진 긴 한 숨, 쳇바퀴는 그렇게 꼬박 2년을 돌았다.

웅크린 모양이 무척이나 야위었다는 생각은 했어도 당신 그 곱디 고운 얼굴에 저승꽃이 만발하고 양털 같던 살갗이 가는 날 받아 놓은 고목껍질처럼 주름진 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리 열달 배 앓아 낳은 자식이라도 아들에게 알몸을 맡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터, 수줍은 새색시 옷고름 물고 내외하듯 주저하실 때 한 말씀 드렸다.

'엄마, 나 그 속에서 나왔어요.'

물결지듯 포개지며 한 줌도 잡히지 않는 등을 미는 아들의 가슴은 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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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서구청 문화계장 유영희씨 /지영철 기자
대전 서구청 문화계장 유영희(柳永熙·45)씨에게 어머니 황복순(黃福順·94년 작고) 여사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한없는 사랑의 원천이다.

40줄 접어 들어 본 늦둥이 행여 털끝 하나라도 다칠까 노심초사하며 품을 내주신 어머니의 젖내가 아직도 코끝을 스치건만 '벌써 10년'이라며 영희씨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 절 낳으셨을 때가 41세입니다. 바로 위 누나와 여덟 살 차이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제가 태어나자 윗목에 엎어 놓은 채 죽기만 기다렸답니다. 햇볕 받은 갓난아이 솜털이 너무 예뻐 살리기로 했다더군요."

생사의 위기를 넘어선 영희씨에 대한 가족의 사랑과 관심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유별났다.

4∼5세 무렵까지 젖을 떼지 않은 영희씨에게 어머니 혹여 탈날까 밥을 씹어 한 술 한 술 떠 먹여 주셨고 다른 형제들에게 엄하시던 아버지도 손자 같은 막내아들 투정에는 너털웃음으로 넘겨주셨다.

"소문난 응석받이였답니다. 떼쓰면 안되는 일이 없었다니까요. 무엇을 사 달라 졸랐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한 번은 실오라기 한 올 거치지 않고 대동 집에서 신안동 포목점까지 울며불며 어머니를 쫓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볼기짝을 물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리고 보았지요. 어머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

그러나 철없던 영희씨 분에 넘치는 모정을 당연히 여기며 어머니를 막 대하는 일이 많았단다. 눈곱만한 솜털 턱 주변을 비집고 나온 몸만 어른, 사춘기 시절에는 툭하면 어머니에게 대드는 일이 잦아졌고 참을 만큼 참은 아버지의 회초리 세례에 어머니 온몸으로 영희씨를 감쌌다.

계란 부침은 영희씨 가슴속에 철부지 시절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 놓았다.

집에서 기르던 닭 두 마리 힘닿는 대로 알을 낳으면 그 중 하나는 냄새만으로도 침샘이 극성을 부리는 계란 부침이 돼 아버지의 밥그릇에 담겨져 나왔다.

"간장 두어 술 부어 계란 부침과 비벼 드시는 아버지를 뵈면 꼴깍꼴깍 군침이 넘어갔습니다. 곁눈질로 그 모습 지켜본 아버지 '먹으랴' 권하시면 전 비린내 나 싫다며 손사래를 쳤지요. 하루는 어머니께서 밥 속에 계란 부침을 넣어 주시곤 아버지처럼 비벼 먹으라 하시더군요. 그리 원하던 밥상을 받고도 '비린내 나는 것 안 먹는다' 공연히 핀잔 부리고 심통을 부렸답니다."

▲ 맏손자 승완군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이 나란히 웃고 계신다.(89년) 당신을 씻겨 드릴 때 두 눈 동그랗게 말아 뜨고 지켜보던 아이는 '내 늙어 힘 빠지면 씻겨다오' 약속 묻고 청년이 다 됐다.
지금도 계란 부침만 보면 속상해 하시던 어머니의 눈빛이 떠오른다.

어머니 손맛을 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은 시래기 된장국과 고추장 돼지 불고기는 세상 어느 요리사도 맛을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영희씨, 요즘도 가끔 손수 시래기를 사다 국을 끓여 먹으며 육감을 만족시키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때로는 학교 수업도 빼먹고, 때로는 가출로 부모님 억장을 무너뜨리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이유 없는 방황이죠. 오냐 오냐 받아만 주시는 분들에게 못할 짓 많이 했습니다. 복에 겨워 그런 게죠."

어머니의 깊은 속을 헤아릴 만큼 머리도 굵어진 것은 군복무 시절이다.

철원 땅 소총수로 배치된 영희씨, 철책 작업에 투입돼 지독한 강원도의 12월을 인내하고 있던 어느 날이다.

이미 환갑이 넘은 부모님, 자식 얼굴 보겠다고 새벽 밥 지어 드시고 산 넘고 물 건너 면회를 오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철책 작업 중에는 면회가 허용되지 않지만 어찌할 바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부모님에게 부대에서 모자상봉을 배려했다.

"부모님 오셨다는 소리에 한탄강으로 가 돌 하나 집어 들고 천수 누린 거북이 등처럼 트고 갈라진 손등을 문질렀습니다. 행여 어머니 마음 아프실까 한 것인데 피범벅이 돼 버렸지 뭡니까. 오후 2시에 연락을 받고 층층시하 외박 신고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넘어 버렸습니다. 어머니 그 추운 날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졸고 계시더군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부모님 그늘서 살던 영희씨 결혼과 함께 당신들의 그늘이 됐다.

혈압과 당뇨로 고생은 하셨어도 공복 아들 내외 뒷바라지에,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손자들 재롱을 지켜보시며 훗날이라도 빚 갚아 드릴 수 있겠구나 안도하곤 했다.

그러나 지병은 신부전증이라는 합병증을 유발했고 주 2∼3회 혈액투석으로 근근이 버티셨다. 영희씨가 직장을 제외한 모든 일상을 포기하고 어머니 병수발에 매달린 것은 아버지 타계하신 지난 92년 무렵부터다.

어머니 밥을 씹어 먹여 주셨 듯 아들도 그 은혜 손톱만큼이라도 갚겠다며 지극 정성을 다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2년을 하루처럼 보내고 나니 심신이 지치기 시작했다.

"익산에 사시는 큰형님이 어머니 임종을 내가 지켜봤으면 좋겠다 하십디다. 처음엔 안된다 했지만 몇 번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보내 드리기로 작정을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눈물을 글썽이며 안 가시려 하지 뭡니까. 결국 형님 댁에 가셨고 그날 밤 죄스런 마음에 몸부림쳤습니다."

어머니 그리 보내 드리고 개운치 않던 마음에 투석만큼은 챙겨 드리고 싶었기에 직장과 병원을 오가는 생활은 익산에서도 계속됐다.

오후 6시 퇴근 종이 울리면 득달같이 익산으로 달려가 투석을 마칠 때까지 곁을 지켰고, 자정이 넘으면 다시 대전 집으로 향했다.

"94년 정월, 형님 집에 피붙이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드시고 싶어 하는 물을 수저에 한 술 떠 드리니 '내 죽어서 붕어가 될란다' 원망 같은 눈초리로 한 말씀 하시더군요. 그리고 일주일 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 어깨 너머로 아버지에게 배운 시조창 한 자락을 녹음해 두기를 잘했다 싶다.

병상에 누워 계신 중에도 그 소리 어찌나 낭랑하던지, 소담한 자태로 바느질을 하시던 40년 전 당신이 숨을 고르시는 것만 같다.

여행 한 번 보내 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는 영희씨, 엊그제 외식 때 아이들이 당신을 꼭 빼닮은 며느리 밥그릇에 고기 한 점 올려 놓고 드시라 하는 모습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계란 부침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일은 시래기 잔뜩 넣고 당신의 젖내를 더듬어 보리라 푸지게 쓰도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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