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쏟아주신 情이 시인의 밑거름

▲ 리헌석씨 /지영철 기자
고래 심줄보다도 더 질긴 부정(父情)으로 얼레에 감긴 연줄은 방패연이 제 아무리 요동을 쳐도 끊어지지 않았고, 아이는 태양을 향해 끝없이 비상했다.

'뚝딱뚝딱' 잰 손놀림 몇 번에 굵은 철사는 빙판 위를 쏜살같이 질주하는 스케이트가 되고, 손수 깎아 준 팽이를 동무들 앞에서 날렵하게 돌려 보이면 주먹질 한 번 하지 않고 골목대장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춘삼월이면 언 땅 비집고 나오는 찔레 순이며 삘기를 뽑아 주고, 가을이면 들녘을 가로질러 메뚜기를 잡아 주셨다.

백 번을 내리쳐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딱지도 손수 접어 어깨 힘깨나 주게 하셨다.

나뭇짐 풀짐을 지고 힘겹게 들어오시는 아버지보다 더 반가운 것은 철마다 지어 나르시는 머루며 다래, 산딸기 같은 생침 도는 주전부리였다.

대전문인협회 회장 리헌석(李憲錫·53)씨에게 아버지 이기준(李旣濬·2002년 작고) 선생은 사계 위에 촘촘히 박힌 반백 년 전 순수의 세계, 고향 땅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하나에 서려 있는 그리움이다.

"어린 마음에도 동네 제일 가는 아버지와 살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 시절 아버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표 나는 자식 사랑에 주저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정만큼은 푸지게 받고 자랐습니다. 그 정이 시를 쓰는 데 보이지 않는 최고의 양분이었을 겁니다. 들로 산으로 언제나 넉넉한 손을 내밀며 함께 다니셨어요. 그 손길이 아직도 가슴속에서 온기를 뿜어냅니다."

배운 것 별로 없고, 가진 것 내세울 일 없는 그 아버지가 공주시 우성면 대성리에서는 라디오 스피커로 통했다.

옳은 말만 하는 것도 그렇지만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면 무엇이든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탐구정신도 남달랐다.

신통방통한 영농기법으로 늘 남보다 한발 앞서나갔고, 낫 놓고 기역자를 가르치며 때 놓친 동네 어른들의 눈을 트여 주셨다.

아버지의 지혜는 위로 아래로 형제들 대신해 끌려간 징용에서 터득한 것이다.

"일본 나고야 전쟁물자 생산 공장에서 징용살이를 하셨답니다. 해방 후 귀국선을 탈 때까지 모진 고초를 당하셨지요. 보고 들은 그곳의 발전상을 꼼꼼히 챙겼고 '배워야 일본을 이긴다'는 확고한 신념을 현해탄 너머 고향 땅으로 옮기신 겁니다."

누에치기부터 양송이버섯 재배까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선진 농업에 손을 대신 것 또한 청년시대 혹독한 시련의 대가다.

▲ 1990년 헌석씨 가족과 부모님의 제주도 나들이. 우마차를 비좁게 만든 아버지 당당한 풍채가 헌석씨의 기억에서는 공연히 눈물만 쏙 빼놓는다.
그러나 불모지를 개척하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 땀의 결실은 그리 옹골지지 못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은 헌석씨를 맏이로 육남매 모두 대학 공부까지 시킨 것으로 완성됐다.

"워낙 부지런하신 분이신지라 먹고 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공납금은 한 번도 제때 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 그 어려운 가운데 저희들을 가르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각별한 애정을 받고 자란 이면에는 헌석씨 위로 먼저 간 형과 누나가 있다.

혹여 셋째도 부모 가슴에 못질할까 태어난 지 1년 뒤에 출생신고를 했다고 하니 말씀은 없으셨어도 생채기는 평생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지병도 모정만큼 진한 부정을 채근했다. 심통으로 약 봉지를 달고 사셨던 어머니, 밭일은커녕 밥 짓고 물 깃는 일도 벅찼다.

아궁이에 불 지피기, 돼지치기, 마늘 찧기, 보리방아 찧기에는 헌석씨의 야무진 손이 보태졌고 우는 아이 달래고 똥오줌 가려내는 빈 자리는 아버지 차지였다.

"한번은 여동생이 그러더군요.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처럼 애처가는 없을 것'이라고. 통증이 오면 한 쪽은 제가, 한 쪽은 아버지가 맡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물렀습니다. 힘겨운 기색 없이 어머니를 대신하셨습니다."

일손이 제법 여문 열일곱 열여덟 무렵부터는 장정 한 몫을 해내는 당당한 일꾼으로 아버지를 거들었다며 헌석씨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알뜰살뜰 검소한 아버지께 헌석씨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호되게 야단맞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5∼6학년 즈음일 겁니다. 소풍 가는 길에 지폐 한 장을 주시며 '조금만 쓰고 거슬러 오거라' 하시더군요. 겁도 없이 그 돈을 모두 쓰고 돌아왔을 때 지금껏 본 적 없는 노기 띤 얼굴로 호통을 치셨습니다."

글밥 먹고 산다면 십리 백리를 쫓아서도 만류했을 시절이었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이해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권장을 하셨다.

당신은 마을 선생이지만 헌석씨에게는 큰 선생이 되라며 교대 진학에도 든든한 뒷배가 돼 주셨다.

"제 글에는 유난히 고향의 냄새가 많이 난다고들 합니다. 구체적인 진실들이 꿈틀댄다고도 하고요.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생긴 것뿐 아니라 재질까지 이어받았나 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당신께서 그토록 하시고 싶었던 것이고 그 소망을 아들이 짊어졌으니 말입니다."

몇 해 전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산으로 들로 다니며 야생초를 머릿속에 담아 놨다.

미역취, 고비, 이름도 생경한 풀 포기들은 아버지에 의해 짓밟혀도 군소리 못할 무명초가 아닌 어엿하고 요긴한 생명임을 확인받았다.

그리고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 유산으로, 당신의 체취를 닮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자식들 손수 씻겨가며 키우신 아버지는 유독 목욕탕에 가는 일만큼은 맏이인 헌석씨와 맏손자만 대동을 허락하셨다.

삼부자 나란히 앉아 등을 밀 때는 그저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도 건장하시던 분이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사시나무마냥 야위기 전까지는 말이다.

헌석씨는 한 달여 전에 선보인 시집 '반 내림을 위하여(오늘의 문학사)'에서 공연히 눈물만 나 당시 내뱉을 수 없었던 쓰린 속을 이렇게 술회했다.

'뼈 깊이 부는 바람 온천물도 차갑습니다 에이듯 저며 오는 시린 가슴 다잡으며 아버지, 날 씻기셨듯이 받은 정을 돌립니다 업혀 두드리던 너른 등이 아닙니다 이기려고 용을 쓰던 유년의 팔씨름 너머 눈물빛, 추억을 남기고 몸을 맡기신 아버지'

배움에 끝이 없다며 늦깎이 박사 도전에 용기를 심어 주신 당신, 3개월을 기다리지 못하시고 번듯한 논문에 손 한 번 올리지 못하셨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자식들을 불러 모으시더니 한 명 한 명 '너는 이래서 좋다' 칭찬을 하십디다. 유난히 교사가 많은 집이라 그런지 부모의 마음으로 가르치라는 주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미 폐암 선고를 받으신 뒤에는 달리 손쓸 방도가 없었어요. 그저 가시는 길 마음 편히 가실 수 있도록 해드리자며 못난 도리에 충실했습니다."

해질녘 지게 위로 수줍은 듯 얼굴 내민 맹가 열매 한 개가 아스라이 붉은 주단을 깔고 그리움을 배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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