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석 사회부 차장

엄밀히 따지면 ‘진정성(眞正性)’이란 단어가 사회에 회자된 것은 2000년대 중후반 들어서다. 지난 2000년대 초중반 일부 재야 논객의 컬럼 등에서 간간히 나오던 ‘진정성’이란 표현이 최근 시대 정신을 관통하는 대명사인양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층도 다양해졌다. 초반 재야층에서 주로 사용되던 ‘진정성’ 단어는 새정부 들어 대통령, 정부 장·차관, 여야 정치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얼마전 퇴임한 지방경찰총수가 퇴임의 변을 통해 사회에 ‘진정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진정성 대세다.

사회지도층부터 앞다퉈 애용하는 단어지만 정작 국어사전에는 ‘진정성’에 대한 용어 풀이가 없다. 언어는 생명력과 사회성을 가져 한해에도 수십개 단어가 생사를 오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처럼 널리 사용되는 단어가 국어사전에도 없다는 것은 의외다. 다만 ‘거짓이 없이 참으로’란 뜻의 ‘진정(眞正)’이란 표현이 있다. 이를 보다 강조하는 의미로 ‘진정성’이란 어원을 대략 유추할 뿐이다. 탄생 경로야 어찌됐던 분명 좋은 의미에 사용될법한 단어가 남발 수준으로 등장하는 곳은 정치권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갖고 접근한 것이 아닌 만큼 본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정운찬 총리 역시 충북을 방문한 자리에서 ‘정부의 진정성을 지역민들이 몰라준다’고 하기도 했다. 최근엔 남북정상회담 문제와 개헌 문제에 대해서도 진정성이 핵심 키워드로 등장한다. 여·야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여당도 야당도 서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할때마다 첫 마디가 진정성 타령이다. 나는 참되고 거짓없이 행동하는데 상대방은 그렇지 못하다란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거나, 자신을 참된 뜻을 알아달라고 호소할 때 이런 저런 말보다 진정성만큼 적합한 단어를 요즘 정치권에서 찾아보기 벅차 보인다.

정치권의 사랑을 듬뿍받는 ‘진정성’이지만 국민들에게는 갈수록 생소한 단어가 되고 있다. 정치권이 남을 탓하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 단어를 경쟁적으로 사용하는게 주된 이유다. 과거엔 재야에서 사회지도층의 이율배반적, 가식적 행태를 꼬집을 때 생명력을 갖던 ‘진정성’과는 사뭇 쓰임새와 전달력도 달라졌다. 국민의 단어를 지도층이 도용해 남발하다보니 오히려 공허한 단어가 됐다. 밑도 끝도 없어졌다.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필수선결과정인 설득, 협의 과정도 필요없다. 내 진정성을 알아주면 되고, 모른다면 서운하다. 제3자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식이다.

언어는 그 시대상을 투영한다. 진정성 역시 이 시대와 사회에 진정성이 결여됐다는 언어의 가르침이다. 갈수록 뜻과 생명력을 잃어가는 진정성이 못내 아쉬워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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