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유성 사기막골 사상자 "100여명 넘는다"

“미군機 수일간 피란민에 기총소사”

■ 유가족·학살 목격자 증언

유성 사기막골 피란민 학살사건 유가족과 목격자들은 당시 미군기의 공격이 며칠간 계속돼 사상자가 최소한 100명을 넘었다고 밝혔다.이들은 또 미군기가 인근 마을등에도 기총 사격을 가했으며 현 방동저수지 인근의 세점에서도 피란민들이 공격을 받고 숨졌다고 주장했다.

사기막골 학살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4일 대전매일과의 인터뷰에서 1950년 7월 중순 한낮에 미군기 4대가 마을에서 주막거리(현재 호남고속도로)까지 800m정도 실개천변 미루나무 아래에 포장을 치고 있던 수백명의 피란민을 향해 기총 사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이교용씨(70·여·서울시 영둥포구 오류동)는「한집에 있던 20대 후반의 서울 언니는 팔이 끊어져 죽어 아버지가 마을앞 산에 묻어 주었고 친 언니도 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평생 불구로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이씨는『개천가에는 피란민 시체가 쌓이고 마을은 불에 타는 집들로 아비규환이었다』고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

마을 주민들도 공격에 놀란 피란민들이 인근 야산과 동네 주민집으로 뛰어 달아났는데 미군기들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은신지에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4-5일 정도 공습이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주민 이인구씨(80·사기막골 상회 주인)는 「마을 주민듭은 산너머 잣띠(현 유성구 성북동)로 피란가고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성탕거리(온천지역)와 대전에서 피란온 사람들로 기억된다」며 「댕댕기 (경비행기)소리뒤 미군기가 날아왔는데 마을 어른이 손을 흔들면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집에서나와 손을 흔드는 순간 흙먼지가 뽀얗게 기총소사가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또 한모씨도「당시 가수원에 살던 아버지(68·대덕구 법동)등 일가가 피란길에 나섰다 진잠 부근에서 11명이 숨지고 아버지와 아저씨등 3명이 골반뼈와 발꿈치에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강인식씨(38)는「평생 불구로 지낸 어머니(73)가 지난 80년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관계 요로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비밀해제 된 조종사 보고 문건 등으로 사실이 드러난 만큼 구와 시등 관계기관에서 50년 7월로 사망 신고된 피해자들을 찾아주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한다」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宋寅杰 기자>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