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2010 대백제전 10배로 즐기기 Ⅰ- 부여

▲ 백재역사재현단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는 게 우리내 인생사의 보편적인 이치다.

아무 부담없이 본 만큼만 느끼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지만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희열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역사적인 유적이나 유물과 마주대하게 될 때, 그 느낌의 무게는 확연히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즐기는 여행은 잠시 접어두고 배우는 여행으로 호랑이해 정월의 문을 여는 것은 어떨까?

우선 충남 부여에서 백제로의 시간여행을 시작해 보자.

◆백제문화의 보고(寶庫) 부여

부여는 백제 678년 역사 가운데 마지막 123년의 왕도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백제 한성시대(기원전 18년~475년)와 웅진시대(475년~538년)를 거쳐 사비시대(538년~660년)가 부여에서 열렸다는 얘기다.

부여는 백제의 왕도였던 만큼 1500년 세월을 간직한 문화유적이 즐비하다.

부소산(성)과 정림사지, 궁남지, 능산리고분군을 비롯해 왕흥사지와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산리사지 등 40여 곳에 이르는 폐사지가 남아있다.

말 그대로 부여 자체가 백제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말 못하는 문화유적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백제역사에 대한 편견과 오해, 왜곡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낙화암과 삼천궁녀’가 대표적인 사례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패망할 당시 낙화암에서 3000명의 백제 궁녀가 백마강(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얘긴데 이 얘기는 의자왕의 방탕함 때문에 백제가 멸망했다는 시나리오로 연결됐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없는 ‘의자왕과 백제 죽이기 시나리오’의 하나일 뿐이다.

그 어떤 역사서에도 의자왕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백제가 멸망했고 그래서 애꿎은 삼천궁녀가 목숨을 버렸다는 기록은 없다.

낙화암이 ‘삼천궁녀의 순결’ 때문에 유명해졌을 지 모르지만 낙화암 삼천궁녀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한 싯구에 등장하는 은유일 뿐이다.

백제는 패망의 역사 때문에 이렇게 너무도 쉽게 왜곡되고 잊혀져 버렸다.

▲ 궁남지

◆당대 최고만을 남긴 ‘백제의 혼’

부여의 백제유적은 대부분 시내권에 밀집해 있지만 단 하루만에 도는 것은 무리다.

그 만큼 보고 이해하고 느껴야 할 것이 많다.

가장 먼저 들려야 할 곳은 백제역사문화관과 부여박물관이다.

‘부여’ 이전에 ‘백제’를 먼저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부여’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부여박물관이 유물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면 백제역사문화관은 백제인의 삶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그래서 백제역사문화관은 백제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최선의 선택이다.

또 가장 최근에 문을 연 만큼 백제의 생활상을 담은 조형물이 실제와 흡사하게 재현돼 있어 아이들 역사교육에도 큰 도움이 된다.

백제역사문화관에서 백제의 큰 줄기를 잡았다면 이제 백제의 흔적을 찾아 떠날 차례다.

백제역사문화관 바로 옆엔 백제 사비왕도를 재현한 백제역사재현단지가 있는데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올 가을 백제역사재현단지의 가치를 더 느끼기 위해서도 백제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먼저 백제역사문화관에서 부여 시내 방면으로 길을 잡아 부소산을 찾자.

천천히 숲길을 따라 부소산을 오르면 낙화암과 고란사를 만날 수 있는데 굽이굽이 백마강과 어울어진 풍광이 일품이다.

그러나 낙화암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나당연합군에 쫓기는 백제인의 절규도 들리는 듯 하다.

백제역사를 좀 안다면 낙화암에서 강 건너편에 자리잡은 왕흥사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소산에서 내려와 정림사지로 발길을 옮기면 거기에선 정림사지5층석탑을 볼 수 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석탑으로 기록된 탑인데 여기엔 백제 패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겨넣었다는 승전기념문도 남겨져 있어 아픔이 있다.

현존하는 백제 석탑은 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5층석탑이 전부고 아직까진 미륵사지석탑이 먼저라는 게 정설이어서 고고미술학의 첫 폐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선 정림사지5층석탑이 먼저라는 설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고고미술학은 새롭게 다시 쓰여져야 한다.

부여엔 서동설화를 간직한 궁남지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서동이 선화공주와 혼인하고 왕(무왕)이 된 뒤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축조했다고 전해지는 데 바로 우리 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다.

궁남지 주변은 현재 연꽃단지로 조성된 서동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매년 5월이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서동요의 로맨스를 재현하기 위해 찾아오는 연인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지난해 1월 익산 미륵사지석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사리장엄이 발굴됐는 데 거기엔 미륵사 창건 주체(지금까진 선화공주)가 ‘사택덕적의 딸’로 명시돼 있어 선화공주의 존재가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지 등 옛 절터를 찾아보는 것도 유익한 시간을 갖는 방법이다.

당대 최고의 문화를 간직한 백제왕도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던 백제인의 순박하면서도 애절한 불교관을 이해할 수 있다.

글=이기준 기자 poison93@cctoday.co.kr

사진=김상용 기자 ksy21@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