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관 건양대 교수

개태사지(開泰寺址)에 들른 적이 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개국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그런데 지금 그 개태사는 없다.

개태사지만 있을 뿐이다. 지금 있는 개태사는 나중에 세운 절로 그때 그 개태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개태사지(開泰寺址)에는 깨진 기와만 흩어져 있었다.

개태사(開泰寺)란 분명한 이름이 새겨진 채로 말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관심을 갖는 이들이 없었다.

커다란 돌확이 담장 밑바닥 중간에 걸쳐 있어도 사람들은 모두 나몰라라 했다.

기왓장을 주워든 내 가슴은 뛰는데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은 누구나 아는 경구다. 그러나 그걸 실천하려는 노력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그런 경구가 자주 인용되는 모양이다.

대전은 역사적 배경이 꽤 오래 된 도시다.

월평동 선사 유적지가 있으며, 수십 개의 토성·산성이 에워싸 삼국시대 이후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고려시대엔 명학소의 난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진잠현, 유성현, 회덕현이 유학의 중심지였음이 증명된 곳이다.

사육신 박팽녕,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사암 박 순, 탄옹 권 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학자가 배출되었으며 근세에 와서도 인동장터 만세사건이 있고 단재 신채호가 태어난 곳이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 견주어도 한 곳에서 이렇듯 많은 역사적 사건을 지니고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곳은 흔치 않다.

연중 문화예술 공연 횟수가 전국 최상위에 들고 중부권 최대의 공연장을 가졌으며, 도시 녹지공원 비율이 최고급인 도시가 대전이다.

그런데도 대전은 문화 불모지란 소릴 자주 듣는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다. 대전에서는 공연이 성공하지 못한다든가 공연을 해도 박수를 많이 받지 못한다며 불평하며 내뱉는 말들이다.

1930년대 대전에는 대전좌와 경심관이라는 공연장이 있었다. 서울에서 지방에 내려오는 공연단은 언제나 대전에 들렀으며 객석은 늘 만원이었다. 극장 주변의 여관에는 공연자를 보러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전 사람들도 작품이 좋으면 모일 줄 알고 분위기가 좋으면 흥분할 줄도 안다. 오히려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풍부한 감성을 지녔다.

이제 우리도 대전을 정리할 때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가꾸고 정리하는 일에 소홀했던 건 아닐까, 스스로 문화적 자부심을 갖는 데 인색한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볼 때다.

대전 사람들이 '어사 박문수는 대전 사람이다, 홍길동전은 대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구운몽의 문학적 고향이 대전이다'라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할 때 서울에서 해남에서 장성에서는 특허를 내고 만화를 만들고 문화제를 만들었다.

우리도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대전을 찾아내고 대전을 만들고 대전을 정리해야 한다. 무턱대고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전학(大田學)을 세우고 대전에 사는 자부심을 키우자는 말이다.

대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많다. 그러기에 대전의 역사는 깊다. 구슬은 많다. 좋은 구슬도 많다. 그러기에 대전학(大田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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