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하면 학산리·금국리 지석묘

은하면 학산리 내남마을에서 거산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지석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1985년 은하면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다.

학산리 지석묘는 시신이 놓여지는 석관이 지상에 노출돼 있는 탁자식인데 뚜껑돌의 크기는 길이 2.2m, 너비 2m, 두께 0.5m이다.

1985년 조사시 지석묘 주변에서 무문토기 동체부편과 저부편, 돌끌 등 유물이 발견됐다.

동체부편은 태토에 굵은 석립이 많이 섞여 있어 거친 편이고 표면은 적갈색, 속심은 흑회색을 띠고 있었다.

이 지석묘에서 서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도 지석묘로 추정되는 3기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

규모는 대체로 길이 1.1m, 너비 1.2m, 두께 0.6m 내외로 서로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는 밭 가운데에 있던 것을 밭을 경작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석재의 크기가 지석묘와 비슷하고 위치도 학산리 지석묘와 가까운 점을 감안할 때 지석묘로 추정되고 있다.
금국리 금리마을에 위치한 지석묘도 학산리 지석묘와 마찬가지로 시신을 안치하는 석관이 지상에 드러나 있는 탁자식이다.

2. 열녀 광주이씨 정려

광주 이씨 정려는 현재 은하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대율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광주 이씨는 영의정을 지냈던 동부 이준경의 후예인 통정랑 이 흡의 딸로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다가 전천상의 계실이 돼 담양 전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갑자기 남편이 병을 얻어 정성을 다해 보살폈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의 장례를 정성껏 치르고 자결하니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의 이 같은 열행은 당시 사람들의 귀감이 됐으며 담양 전씨 문중이 주체가 돼 은하면 장촌리 장촌마을에 정려를 건립했으며 시일이 지나면서 낡아 40여년 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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