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의 가고시마 남쪽 끝, 태평양 바다에 마주한 평화공원은 가을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했지만'평화'라는 이름과는 달리 살벌했다. 이곳이 바로 그 악명 높던 자살특공대 '가미가제(神風)'의 기지가 있던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도 전쟁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전시관 벽을 가득 메운 출격전사자들의 사진과 그들이 남긴 소지품들, 출격전 천황이 내린 술이라며 황공스럽게 잔을 비우는 사진들과 일장기(日章旗)에 남겨진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의 마지막 한마디들이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간다.

그들이 타고 갔던 비행기에는 돌아올 수 있는 연료가 없이 떠났다니 '죽음'이외는 선택의 길이 없었다. 바로 그 비행기의 잔해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곳 멀리까지 많은 일본인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 모든 유품들을 돌아보며 그 광란의 일본역사를 가슴에 입력시키고 돌아간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일본이 모병제이지만 전쟁이 나면 나라를 위해 싸우러 나가겠다는 젊은이들이 60%를 넘는다는 통계다.

또 하나 이곳에서 알게 된 놀라운 것이 있다. 출격 특공대 전사자들 가운데 우리 한국(조선)의 청년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했기 때문에 누가 한국인인지 구별을 못한 채 출격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출격을 앞둔 마지막 날 밤, 특공대원들을 위한 파티가 벌어졌을 때 그중에 한사람의 정체가 밝혀졌다. 진탕 마시기도 하고 마지막 글을 남기기도 한 다음 각자 노래를 한 곡씩 부르는데 한국인 출신 특공대원 차례가 되었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으나 잠시 머뭇거리다 뚜렷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이때 동료들은 그가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임을 드러냈고 다음날 '가미가제'가 되어 죽었다. 물론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그 젊은이는 심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고 따라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비행기와 함께 목숨을 던져야하는 그 모순 앞에 마지막 양심의 목소리를 터뜨린 것이 '아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기야 요즘 지식인이라는 사람도 세종시 문제에서 보듯 권력이라는 신기루 같은 것에 쫓겨 영혼을 팔고 가미가제가 되는 현상이 우리 주변에도 많다.

국민의례, 애국가까지 거부하는 극단적 좌파 사람들, 역시 돌아오지 못할 비행기를 탄 가미가제라고 할 수 있다. 지난주 충격적인 두산그룹의 전 회장 자살 등,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가미가제식으로 죽는것도...

평화공원을 나와 가고시마 남쪽, 일본의 땅끝 마을에 해당되는 이브스키의 백수관(白水館)에 도착했다. 그리고 5년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전 일본수상이 정상회담 하던 방을 돌아보았다. 확 트인 창밖으로 태평양바다가 넓은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 창 앞에 서서 솔밭사이로 밀려왔다 부서지는 바다 거품을 보며 지금은 세상을 떠난 노 전 대통령이 그때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다시 해변으로 나와 무작정 걷다보니 흩어져 나부끼던 상념들이 잠잠하게 정제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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