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의당 백제고분 출토 역사적 의미

? ?
?
? ?
?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무령왕릉 이후 최대, 최다 규모의 백제고분군 유적이 확인돼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에 의당면 수촌리 일대에서 발견된 유구 및 유물들은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백제시대의 토광묘 및 수혈유구 등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출토되는 유물을 비롯해 금동신발과 금동관모 등 국보급 유물까지 다양하면서 다량으로 발굴돼 학계에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발굴에서는 특히 백제의 유물뿐 아니라 중국제 유개청자사이호 1점과 흑유도기 3점이 함께 발굴돼 그 당시 웅진지역도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각종 유물과 함께 중국제 도자기를 함께 매장할 수 있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던 인물로 추정돼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는데도 영향을 미쳤을 것란 추론도 가능해졌다.

특히 발굴 유물 중에는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금제귀고리, 환두대도 3점 등은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동신발과 금동관모의 출토량은 단일 유적으로 최대며 금동신발 중 일부는 T자형 무늬와 용무늬 등이 육안으로 확인되는 등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확인됐다.

금동신발의 경우 무령왕릉 출토 2켤레와 전북 익산 입점리 1호 석실분 출토 1켤레, 전남 나주 복암리 3호분 1켤레만이 확실한 발굴품으로 알려져 있어 비교군도 많지 않아 이번 출토는 금동신발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전망이다.

또 금동신발은 이화여대 박물관과 서울 역사박물관에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금동신발이 각 1켤레 및 1짝이 소장돼 있으나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없는 구입품인데 반해 이번에 발굴된 금동신발은 출토지가 정확할 뿐 아니라 다른 유물들과 비교해 볼 때 연대마저 추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백제의 도읍이 웅진이 아닌 한성이었다는 점에서 유물들의 사용자가 왕실 사람이기보다는 지방의 토호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무령왕릉의 유물처럼 대거 국보로 지정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난 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금제관식을 비롯해 금제 팔찌, 금제 귀고리 등 총 108종 2906점의 유물이 출토돼 이 중 국보로 지정된 것은 12점에 달했다.

이번에 금동신발, 금동관모와 함께 제2지구에서는 중국제 흑유도기 3점과 중국제 유개청자 1점 등도 출토돼 이곳이 당시 상당한 기반을 갖춘 세력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함께 초기 철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의 분묘군이 조사돼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발굴의 성과로 볼 수 있다.

초기 철기시대 토광묘 1기의 내부에 다양한 청동유물과 토기가 매장됐던 것으로 확인돼 초기 철기시대 토광묘의 유용한 자료가 될 것으로 분석된다.

1지구에서 발견된 유물은 청동기시대 주거지 1기, 초기 철기시대 토광묘 1기, 백제시대 토광묘 2기, 백제·통일신라시대 석곽묘 및 석실묘 12기, 백제시대 수혈유구 2기, 고려·조선시대 토광묘 13기 등 총 30여기이며 유물은 청동기 5점과 청동기시대 토기류, 초기 철기시대 토기류, 백제시대 토기류 등이다.

2지구 유구는 백제시대 토광묘 2기, 백제시대 석실분 3기, 백제시대 석곽묘 1기 등 총 6기이며 유물은 금동관모 2점, 금동신발 3켤레, 환두대도 3점, 금제이식, 곡옥, 관옥, 금동과대 1점, 마구류, 중국제 흑유도기 3점, 중국제 유개청자사이호 1점, 백제시대 완형 토기 20여점, 관정 및 꺾쇠류 등이다.
?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