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한남대 교수 / 대전문협 부회장

수능시험이 끝나자 성적부진을 비관하여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올해도 여럿 들려왔다.

초등학교부터 12년 또는 그 이상의 공부를 단 하루 그것도 대부분 객관식 문제로 판가름하는 비정의 단판승부, 수능시험에 대한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시험을 못 봤다고 곧바로 삶을 포기하는 10대들의 충동과 즉흥적 감정 표출만을 탓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한 가족에 자녀가 한 두명이 되다보니 부모들의 기대는 두 배, 세 배로 늘어난다. 과거 아이들이 여럿이었을 때는 일부가 미흡하더라도 그 충격은 덜하였다. 요즘처럼 부모들의 바람이 여과 없이 과부화되는 경우 수험생의 절박한 심정과 패배감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우선 대입제도의 근본적 문제점과 수능성적으로 대학 서열매기기, 상존하는 학벌우선 그리고 핵가족 체제의 부작용이 그 원인이 아닐까. 그리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능비관 자살은 특히 교육과 관련한 우리 사회의 전근대적 구도 속에서 난마와 같이 얽혀만 간다.

30여년 전 시행됐던 대학입학 예비고사제도는 이름 그대로 예비시험이어서 여기에 합격해야 각 대학별 본고사 응시기회를 부여했다. 수준도 그리 높지 않아 웬만한 고등학교에서는 대부분 합격했고, 불합격한 경우 예비고사를 요구하지 않는 각종 학교나 재수 또는 직업전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예비고사를 거친 수험생은 각 대학별로 다양하게 실시하는 선발시험에 응시하고 전기, 후기, 추가모집 등으로 나누어 상당한 기간을 두고 선발하는 관계로 선택의 폭이 넓었다.

예비고사가 학력고사 그리고 수능시험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대학입시의 자율성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다. 자율화할 경우 부정, 부실한 방법의 선발로 교육의 질적 저하와 대학운영의 방만함이 우려된다는 것이 한결같은 이유이다. 어느 사이 수험생수가 대학정원을 크게 밑도는 때가 왔다.

온당치 못하게 학생을 뽑아 부실하게 가르치는 대학이 있다면 교육부 제재에 앞서 학생 본인과 학부모가 먼저 외면할 것이다. 대학사회가 투명해지고 여러 경로로 검증절차를 거치고 있는 대학운영, 교육은 이제 각 대학의 교육이념과 현실 그리고 고유한 색채를 보장해 주는 차원에서 완전자율로 넘길 때에 이른 듯하다. 특히 사립대학의 경우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절대부분을 담당하면서도 국·공립대학에 비해 엄청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완전자율화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대학교육을 받을 능력이 없는 학생을 선발한 대학은 결과적으로 부실교육, 경영난, 취업경쟁에 밀려 도태될 것이고, 반대로 다소 부진한 학생을 뽑았더라도 열정과 사랑으로 가르쳐 당당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키는 대학은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모든 것이 무한경쟁에 접어든 이즈음 대학입시 개선방안의 묘수가 없다면 수험생/대학정원을 감안하여 매년 적정 가변비율로 합격자를 정하는 예비고사제도를 도입하고 그 다음은 대학에 일임하자.

학력고사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당시 예비고사의 문제점이 그동안의 급격한 환경변화로 이제는 그리 큰 설득력을 갖지 못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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