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協 만들고 키우기' 30년 외길

청양 백곡리는 일제 식민치하 때 준봉 조 은 선생이 의병을 모았던 지역이자 임정식 장군은 "왜군을 물리치지 않고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며 빼앗긴 조국에 대한 한을 읊었던 곳이다.

김철운 한국물가협회장은 청양 백곡리 출신으로 1973년 그야말로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물가 분야에 뛰어들어 어느덧 3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지난 5월 한국물가협회 30주년을 맞이한 김 회장은 자신이 창립하고 가꾸었다는 보람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 경제 분야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

한국물가협회 창립 당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도성장을 내걸고 중화학 분야의 중점적인 육성에 박차를 가하는 시기였다.

이를 위해 정부에선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왔고, 이를 대부분 중화학 분야에 투자했다는 것이 김 회장의 회고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예산을 세우고 이를 합리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선 운영체계가 필요했음에도 객관성 있는 물가자료 하나 없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물가자료가 정부 예산의 기본 자료가 되고, 이를 통해 효율적인 예산의 집행은 물론 예산 낭비를 방지하는 데 절실한 것이었으나 누구 하나 이 분야에 뛰어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당시 김 회장은 자신이 대학에서 전공한 회계 분야를 바탕 삼아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김 회장이 물가협회를 구상할 당시는 물가협회를 창립할 만한 능력을 갖춘 분들이 삼성 이병철씨나 현대 정주영씨 등 일부 몇 분밖에 없었던 시기로 그만큼 김 회장은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다.

김 회장은 "남을 도울 때 대가를 바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도우면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며 그 당시 자신을 도와준 인사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김 회장은 물가협회 창립을 위해 동분서주할 즈음 전 재경부 장관이었던 진 념씨가 당시 경제기획원 과장으로 재직, 그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

김 회장은 "물가협회 창립으로 원가계산 분야에서 예산이 5년 동안 50%나 절감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하며 "한국물가협회는 현재도 정부 조달업무의 기본 데이터가 되고 있다"고 자부심을 밝혔다.

30년간 한국 물가의 산증인으로서 평생을 보낸 김 회장은 고희를 앞두고 있지만 사회적 활동과 일에 대한 욕심은 요즘 젊은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김 회장은 지난 90년에는 한국데이터베이스 산업협회장에 취임, 각종 물가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는 물론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정보통신 분야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김 회장은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총재로 재직하면서 충청도의 충절과 예절을 실천하고 있다.

충·효·예 실천본부를 통해 김 회장은 교육사업과 소년소녀 가장돕기운동, 출판기념 및 연구사업, 정년자 직장 알선운동을 펴가며 그늘진 곳의 삶을 보살피고 있다.특히 충·효·예 실천본부는 미국에도 4개 지부가 있을 정도로 김 회장이 왕성한 활동을 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 회장은 "교육의 근본이 무너진 것이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며 "충청도는 겸인지덕인 고장인 만큼 무너진 신뢰와 용기를 복원시켜 새 시대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약 력> ▲1956년 영명고 졸 ▲1960년 세종대 회계학과 졸 ▲1981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졸 ▲1988년 명예 철학박사(미국 크리스천대) ▲1992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68년 산업경영연구소 기획실장 ▲1975년 한국물가협회 이사장 ▲1976년 월간 '물가자료' 발행인 겸 편집인 ▲? 1986년 한국물가협회장 ▲1988년 동아전산인쇄㈜ 회장(현) ▲1990년 한국데이타베이스산업진흥회장 ▲1992년 한국데이타베이스산업진흥회 명예회장 ▲1993년 서울YMCA 감사·동 이사(현) ▲1994년 칠백의사기념사업회장(현) ▲1997년 (사)충효예실천운동본부 총재(현) ▲1998년 민족화합운동연합 공동상임의장 ▲1998년 한국물가협회 상임고문 ▲2003년 동 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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