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1971년 7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제7대 대통령 취임식을 끝냈으나 무리하게 3선 개헌을 밀어 붙인 여파로 마음이 찜찜했다. 그런 가운데 취임 1주일도 안돼 분위기를 반전시킬 긴급 보고가 청와대에 날아왔다. 1500년 침묵을 깨뜨린 충남 공주에있는 무령왕릉 발굴이 그것이다. 국내 언론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 뉴스로 들끓었고 NHK방송은 현지에서 중계를 할 정도였다. 과연 한국사 최고의 발굴이었고 경사였다. 국민들도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정말 좋은 길조다!"

박정희 대통령은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무령왕릉 발굴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가운데 1971년 7월 10일 아침 공주에서 새벽 고속버스편으로 박물관관계자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귀중한 유물을 들고 중앙박물관으로 올라갔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 에스코트를 받아도 부족한 세계적 유물을 어떻게 발굴 하루만에 보자기에 싸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져갈 수 있는가. 대통령이 보고 싶어 한다는 말 한 마디에 다급하게 싸들고 서울로 가져갔다는 설도 있고 박물관 측에서 자청하여 그렇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주장도 상식을 초월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무령왕릉의 무모한 상황은 발굴 시작부터 벌어졌다. 7월 8일 폭우 속에 발굴하여 다음날 오전 9시까지 그 어마어마한 유물을 불과 12시간 만에 해치운 것부터가 그렇다. 국보 17점을 비롯 2906점의 유물이 번개처럼 처리됐고 관에서 나온 나무조각, 못같은 것은 아예 가마니에 쓸어 담았다는 것이다.

중국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에 대한 발굴이 1974년 발견서부터 1984년까지 10년이 걸렸고 24년 만인 금년 봄 재개된 것에 비하면 너무 부끄럽고 무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더 무모한 것은 7월 8일 발굴현장에서부터 시작됐고 그것의 주역은 언론의 과열경쟁이었다. 서울에서 내려 온 기자들로 뒤범벅이 된 공주시 송산리 무령왕릉(그 때까지는 무령왕릉인지 확인되지 않았음)의 좁은 공간은 폭우까지 내려 아수라장이었다. 발굴 관계자들은 오후 3시쯤 참외와 수박, 그리고 소줏잔을 놓고 제사를 올렸다. 왕릉을 개봉하는 제사치고는 너무도 초라했지만 '빨리 개봉하라'는 기자들의 빗발치는 성화에 서두르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상황은 통제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기자들이 왕릉현실에까지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고 하니 그 이상 어떻게 설명을 할까? 필자도 당시 취재기자로서 현장에 달려가 보니 박물관 복도에 무질서하게 늘어놓은 유물 등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무령왕릉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된 석수(石獸)의 머리 가운데 있던 뿔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연했다. 이렇듯 '한국사 최고의 발굴'이 '최악의 발굴'로 끝난 무령왕릉은 그런 소용돌이 속에 38년을 맞는다.

그로부터 38년- 다행히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은 매우 높아졌다.

설사 대통령이 보고싶다고 한들 보자기에 국보급 유물을 싸서 버스를 탄다든지 아무리 언론이 발굴을 재촉해도 고고학적 분석과 보존처리에 대한 조치 없는 발굴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문화가 바로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것을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 앞에 서서 38년 전을 생각하며 깊은 감회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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