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학 양성하며 고향발전 앞장

"고향이란 태어나고 자라고 정든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미지와 향수가 항상 머릿속에 담겨 있어야겠지요."

당진 출신의 동국대 고분자 물리화학과 성용길 교수를 만난 곳은 그의 연구실이었다. 흡사 박물관같은 과학관 건물 내에 마치 고서점을 연상케 하는 연구실. 비좁은 공간이었으나 손때 묻은 탁자와 의자는 마주앉은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성 교수는 손수 커피를 끓여 내온 후 고향의 어린 시절로 점차 빠져들어 갔다.

63세 노(老) 교수의 인생 골목골목에는 훌륭한 은사들이 있었다.

5∼6세 유치원 시기. 한학자이신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한글도 모르는 상태에서 천자문을 6개월 만에 외웠고, 나머지 6개월 동안 2∼3차례 반복했다.

"글 자체보다도 공부하는 태도, 공부하는 심성을 배웠던 것 같아요. 특히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방향을 잡아 줘 인격 형성에 상당히 큰 도움을 줬던 것 같습니다."

성 교수는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성 교수는 창령 성씨로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드는 데 깊이 관여한 집현전 학자 성삼문(成三問)이 있다.

"한글을 만들기 위해 중국에 13번이나 걸어서 갔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 늘 자랑스럽습니다."

그 때문인지 성 교수는 한글도 일찍 깨우쳤고, 그림일기에도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송석리에서 송산국민학교까지는 10리길, 어린 걸음으로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성 교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이 늘 남아 있고, 이 길을 따라 등·하교했던 여정을 자연학습장에 비유했다.

호기심의 첫 출발. "길을 가다가 보랏빛 나팔꽃을 보았습니다. 근데 꽃잎에 더 이쁜 무늬가 있었고, 그게 무언가 하며 유심히 보았습니다. 개미가 오줌을 싼 흔적이었죠."

성 교수는 중·고등학교 때까지 그 무늬의 원인을 궁금해하면서 간직해 왔다.

원인은 개미산이었다. 그때가 고1 때였으니, 10년 만에 해결책을 찾은 셈이다.

한문, 국어, 자연 등의 경험에 숫자 개념을 도입하게 된 건 구구단을 외우면서부터이고, 김원기 전 경제기획원 장관의 삼촌이었던 김사연 선생님이 그 길목에 있었다.
중학교 때는 외가(순성면)에서 살았다. 면천중학교가 집에서는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양잠(누에고치)을 감별하는 일을 했는데, 성 교수는 할머니를 '선각자'라는 말로 표현했고, 엄하면서도 따뜻한 사랑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성 교수는 할머니로부터 풀 베는 일, 호미질 등을 배우고 집안 일을 많이 거들었는데, 할머니로부터 받은 칭찬을 생각하면서 "교육에 있어 칭찬은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성관제 영어 선생님이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통역을 하다가 오신 분으로 회화식으로 영어를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성 교수는 "회화식 교육이 영어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대수나 수학에도 흥미를 느꼈다"며 "특히 선생님을 좋아하는 게 그 과목을 배우는 데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당시에는 정구나 탁구가 유행했는데, 정구로 건강을 유지해 온 성 교수는 "요즘 골프를 치는데 자꾸만 정구 폼이 나온다"고 푸념했다.
인생의 전환기가 됐던 사건은 중학생 때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중학교 선배인 이석선이라는 분이 고등고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들은 것.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고시 동기이기도 한 이 변호사의 고시 패스 사실을 접한 후 성 교수는 '그게 뭘까', '왜 저렇게 유명해질까'라는 의문과 함께 상당히 고무돼 "꿈이 그 때부터 생긴 것 같다"고 되뇌었다.

화학의 첫 단추를 끼워준 분은 당진상고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서울사대 화학과 출신의 손낙철 화학 선생님. 손 선생님은 화학을 재미있게 가르쳐 줬고, 여름방학 때는 선생님과 함께 작품을 출품해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1등을 한번도 놓치지 않았던 성 교수는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동국대 특대생을 택했고, 졸업 때까지 'A+'를 놓치지 않아 평점 95점으로 총상장을 받고 졸업했다. 당시 총장이었던 김범린 전 문교부 장관의 강권에 따라 대학원과 교수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 이전인 고교 때 손 선생님이 "동대 교수 중 동창이 있다"며 가서 교수가 되라는 엄명(?)이 있었다.

30세 때는 부산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유타대학에서 안드레와 아이린 교수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그후 부산대에서 3년 동안 재직했고, 동대 은사들의 강권에 의해 동대로 자리를 옮긴 후 현재까지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성 교수는 인성, 전문성, 창의성, 사회봉사 정신에 대한 가르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재경 당진군민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성 교수는 "마지막 덕목인 사회봉사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이 일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표현은 그만큼 어려운 법. 고향이라는 말 앞에 성 교수는 "고향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짧게 표현했다.

<약 력>▲1941년 1월 19일생 ▲1959년 당진정보고 졸 ▲1964년 동국대 화학과 졸 ▲1968년 동 대학원 화학과 졸 ▲1975년 이학박사(부산대) ▲1978년 이학박사(미국 유타대) ▲1968년 가톨릭의대 조교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연구원 ▲1971∼81년 부산대 조교수·부교수 ▲1975∼78년 미국 유타대 연구원 ▲1981년 동국대 이과대 부교수 ▲1984년 동 화학과 교수(현) ▲1997년 동 이과대학장 ▲1997년 한국생체재료학회 부회장 ▲1999년 한국고분자학회장 ▲2000년 미국 유타대 교환교수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