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고향이 이곳 구마모토에 있는 기구찌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고고학(考古學) 클럽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저의 고향에 있는 '기구찌' 성(城)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왜 백제인들이 일본 땅에 와서 성을 쌓았는가 하는 거죠."

일본 구마모토의 가바시마 이쿠오지사는 지난 9일 오후 구마모토 뉴스카이호텔에서 개최된 '백제문화와 기구찌성(鞠智城)' 심포지엄 개막식에서 그렇게 말했다.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주최한 이 심포지엄에는 이완구(李完九) 충남도지사, 김현명 후쿠오카 총영사, 이인구 계룡건설명예회장 등이 참석했고, 한·일 백제관련학자와 400명이 넘는 일본인 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자리가 없어 뒤에 서 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런 뜨거운 분위기로 심포지엄이 진행되기는 일본에서도 드문 현상이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많은 일본인들이 이 심포지엄에 관심을 가졌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들 옆에 있는 기구찌성이 백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늘 궁금했던 것이다. 가바시마 이쿠오지사도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 해답을 제시한 것이 이번 심포지엄의 가장 큰 성과라면 성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백제·신라)와 일본, 중국(당나라) 등이 얽힌 최초의 국제전 산물이 '기구찌성'이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융성하던 백제가 하루아침에 망했다. 그러자 일본은 백제를 돕기위해 663년 8월 군사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정신적 어머니 백제를 도와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적게는 전함 170척에서 1만여 명의 군대, 많게는 2만 7000명의 군대가 파견되는 그 당시로서는 대규모 파병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금강하류 백강(白江 또는 白村江) 전투에서 당나라 군사의 협공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고 패퇴하고 만다. 긴 항해에 병사들이 지쳐 있었고 금강의 지리를 잘 몰라 좁은 강안에 갇힌채 강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것. 이 전쟁은 일본과 중국이라는 외세가 처음으로 이땅에서 부딪치며 금강을 피로 물들인 역사적 비극이었다. 그러자 백제의 지배계층, 특히 학자와 관료, 문화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을 일본 역사는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르는 데 이들이 곧 일본의 정치, 행정체계를 바로 잡고 문화를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백제는 망했지만 백제인은 망하지 않은 것이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일본의 유수한 학자들이 이를 인정하면서 이들 백제 '도래인'이 없었으면 일본의 발전은 100년 뒤졌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일본은 자기들 군대가 당나라와의 금강전투에서 전멸한 것에 충격을 넘어 공포에 휩싸이게 됐다. 그런 파워를 가진 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일본을 처들어 온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백제에서 건너간 유민들도 마찬가지로 두려웠다. 그래서 방어용 성을 쌓기 시작했고 '기구찌성'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특히 이 성을 쌓는 작업은 백제인들이 감독하고 팔각형 지붕을 비롯 백제양식을 취했다. 그러나 대륙으로부터의 침공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그 한 많은 백제인들은 일본땅에 '백제'를 심으며 살아져갔다. 이것이 백제인의 운명이며 기구찌성의 운명이다. 그래서 이완구 충남도지사가 이날 기조연설에서 "우리 양국이 불편해 질 땐 백제만 생각하자. 그 속에 모든 해답이 있다"고 한 말은 많은 여운을 남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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