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김삿갓'으로 너무 유명한 김립(金笠)은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풍류로 살다갔다. '김삿갓뿐이 아니었다.

재질이 뛰어난 많은 인물들이 벼슬길에 나서길 꺼리며 초야에 묻혀 살려고 했다. 귄력 앞에는 부모자식도 없었고 형제마저 피를보는 현실이 그렇게 선비들을 현실도피로 몰아갔다. 그래서 생겨난 제도가 '유일(遺逸)'이라는 것이다.

학식과 인품을 두루 갖추었으나 과거 시험에 응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를 특채하는 것.

윤증(尹拯 1629 ~ 1714)선생이 '유일'의 대표적 인물이다.

호를 명재(明齋)로 한 윤증선생은 일찍이 우암 송시열(宋時烈)선생밑에서 학문을 닦았고, 그 제자들 가운데 매우 출중하여 '고제(高第)'로 지목되었다. 따라서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대사헌, 총무처장관격인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한번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벼슬을 사양했다.

이렇게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벼슬에 제수된 윤증선생은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임금이 얼굴 한 번 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우의정'이라는 최고의 삼공(三公)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오직 윤증선생 뿐이다. 그래도 그는 이를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오직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종학당, 백록당과 정수루를 지어 스스로 학문을 닦으면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그를 '백의(白衣)정승'이라 부르기도 한다. 권력을 탐하지 않는 '충청도 선비'정신의 귀감이기도 하다.

스승 송시열선생의 제자로서 청나라와의 관계, 주자학에 대한 입장 등 정치적, 학문적으로 스승의 길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여 마침내 같은 서인(西人)이었으나 송시열선생은 노론(老論)의 영수로 윤증선생은 소론(少論)의 영수로 갈라서기도 했지만 앞서 길을 닦은 사계 김장생 선생과 함께 조선왕조의 기둥을 이루었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표적 지도자라 하겠다.

다만 윤증선생은 정치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실리를 추구했고 주자학의 카테고리에 매이지 않는 새로운 사회사상을 섭렵했다. 그것은 곧 당대를 이끌었던 노론을 견제하는 건강한 정치세력을 대두시켰으며 나아가 영·정조의 문예 부흥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는데 그 중심에 윤증선생이 있었다.

그 윤증선생이 남긴 유품 또한 역사적 문화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인데 그동안 종중과의 교섭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내일 우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1만점 가까운 유물이 영구 기탁된다.

윤증선생의 영정을 비롯, 우리 역사상 최고의 글씨로 평가받는 한석봉의 편지 등등 유품 하나하나가 우리조상의 숨결과 체취가 묻어나는 것들이다.

특히 종손 윤완식씨 등 후손들은 이 유품을 보존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고 6.25 사변 때는 피난보다는 땅에 묻어서 망실되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 쏟았다. 그런 까닭에 명재가의 유품은 우리나라 최대 유물소장 가문으로 꼽힌다. 조선시대 대선비를 배출했던 명가의 후예로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자금을 아낌없이 내놓았던 고고한 충청도 선비의 풍모가 이제 우리 충청인의 품으로 돌아왔음은 충청인 모두 큰 박수를 보낼 일이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이번 유물수집을 계기로 특별전을 개최, 도민들에게 선보이고 도록도 발간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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