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철 농협 충남지역본부장

10월의 가을 들녘은 더없이 아름답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며 수줍게 고개 숙인 벼 이삭들은 우리의 농심을 상징하는 듯 지순하기만 하다.
푸르른 5월 초 산 저 멀리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를 벗 삼아 모내기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비로소 결실기에 다다른 것이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지만 사실 벼는 농업인들의 피와 땀이 담겨 있는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얼마나 벼농사가 힘들었으면 쌀을 미(米)라고 했을까. '米(미)'자가 상징하는 것은 자식을 기르듯 쏟아 온 농민의 정성이다. '八十八'(여덟 팔, 열 십, 여덟 팔)로 이루어진 米(쌀 미)에는 여든 여덟번의 손길을 거쳐야 하는 농부의 인고와 형극의 세월이 담겨 있다.

온갖 정성으로 농사를 지어 놓은 농민들에게 올가을은 너무 잔인했다. 한가위 때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매미' 때문이다.

어느 한해 마음 편하게 수확해 본 적이 없다지만 올 태풍 피해는 과거 어느 때보다 타격이 컸다.

멕시코 칸쿤에서 WTO(세계무역기구) 제5차 각료회의 등을 통해 농산물 시장 개방 압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태풍까지 불어닥쳐 혹여 농업인들이 좌절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충남지역의 경우 큰 피해를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하기에는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가 너무 크고 깊다. 130명이 죽거나 실종됐고, 4조7800억원에 달하는 재산피해를 안겼다. 이렇게 극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태풍과 수해의 최대 피해지역인 경남과 경북, 강원도 수재민들이 재기의 삽질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애지중지 길러온 농작물도 그렇지만 가재도구까지 잃은 상태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럽고도 고마운 일이다.
더욱 고마운 일은 전 국민적인 온정의 손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돼지 저금통을 터는 고사리 손의 초등학생에서부터 김치를 담가 수해지역으로 보내는 도시 주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민들이 태풍 피해의 아픔에 동참해 재기를 돕고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 농민들과 현장에서 아픔을 나누고 다시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특히 불의의 태풍과 산불로 적지 않게 도움을 받은 충남도민 입장에서 이 같은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한번 상기해 보자. 지난 87년 태풍 '셀마'가 충청도 산하를 할퀴고 갔을 때는 물론 지난해 청양에서 일어난 산불을 비롯 크고 작은 재해시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답지했고, 자원봉사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성금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태풍 피해 주민들을 도왔다고 하기에 무언가 허전하다. 이번 태풍 피해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요, 남의 일일 수도 없다.

사실 우리 민족은 어려울 때 서로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상부상조나 협동, 두레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릿고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시대를 연 힘 중 하나는 어려움을 함께 헤쳐 온 아름다운 국민성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흔히 슬픔을 나누면 아픔이 반으로 줄고, 기쁨을 나누면 즐거움이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수해민의 고통을 헤아리며 함께 복구의 삽질을 한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추수의 기쁨을 만끽할 내년을 기다리며 피해 주민들의 재기를 돕는 일에 다 함께 나서자. 직접 피해 현장에 가서 구슬땀을 흘린다면 크나 큰 힘이 될 것이다.

다시봐도 우리의 가을 들녘은 아름답기만 하다. 모든 어려움을 헤치고 내년에는 농업인 모두가 풍년의 노래를 합창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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