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위해 헌신한 '법조계 거목'

"고향은 조상 묘소가 있고, 태어나서 성장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곳이자 친구와 친척이 많이 살고 있는 종합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엔 이 모든 것들이 대전·충남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어디를 고향이라 콕 찝을 순 없습니다."

김종구 전 법무부 장관은 '고향'이라는 단어를 자신에 대입시켜 이렇게 표현하며, 웃어 보였다.

김 전 장관의 본적지는 천안이고, 출생지는 아산이다. 2~3세까지는 충남 홍성군 광천면에서, 6세까지는 대전에서, 몇 개월은 천안에서, 7세에 아산에 있는 온양국민학교에 입학해 당진군 소재 합덕국민학교, 2학년 때는 천안 중앙국민학교, 4학년 때는 천안 목천국민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그 후 천안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천안과 대전에 오랫동안 거주하게 됐다.

"5세 때인가,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도 교장을 시켜 준다는 방침에 따라 당시 대전공업학교(현 대전공고) 선생님으로 계시던 부친이 교장으로 임명되어 그때부터 아버지는 충남 전역을 돌아다니시며 교장을 하셨습니다. 잦은 이사에 어머니께서는 고생이 많으셨지만, 어린 나는 어디를 가든 1년만 지나면 새로 이사갈 곳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들떠 있었죠, 제가 호기심이 많은 건 그때문인가 봅니다."

김 전 장관은 "아버님이 처음 재임하셨던 학교는 천안시 북면의 천북국민학교인데 그 앞 개울에서 누님과 함께 징게미(큰 민물새우)를 잡다가 쏘인 적도 있고, 가재나 고동도 많이 잡았던 기억이 난다"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지난 92년 대전지검 검사장 부임 후 위례성에 올랐다가 거기를 한 번 들러봤지. 그런데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큰 나무가 있던 자리는 교회로 변했고, 맑은 개울은 농수로로 바뀌었더군"이라며 아쉬워했다.

그곳천안에서 해방을 맞은 당시 6세의 김 전 장관은 주민들이 학교 교실을 점거한 후 유리창을 마구 깨던 모습, 6·25 전쟁이 나 천안으로 피난 갔을 때 어떤 분이 마을 인민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마을 주민들을 보호해 줬고, 수복 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당국에 진정을 호소해 그의 목숨을 구해 줬던 일 등을 떠올렸다.

김 전 장관은 "해방이나 6·25 같은 기세가 거의 미치지 못한 걸 보면 천안은 '하늘 고요 땅'이라는 말 그대로 천혜의 요지인가 봅니다. 지리도참설에 천안 한가운데 언덕이 있어 오룡쟁주지세(五龍爭珠之勢, 용 5마리가 구슬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 지세)라 기록돼 있다 하여, 어릴 때부터 길지 중의 길지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하고 천안에 대한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김 전 장관은 대전에 대해서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밤낮으로 공부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하고 시치미를 뚝 뗐다.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모의시험을 쳤고, 100명을 등수대로 게시판에 붙여 놓았죠. 100명 이상은 서울대에 보내겠다는 거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냥 공부만 했어요.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그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많은 자극이 됐습니다."

김 전 장관이 재학할 당시에는 대구 사범학교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지도했던 박관수 선생이 교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경북대 교학처장을 지냈고, 대구에 연고가 있던 박 교장은 "내가 대구에서만 살다가 여기 와 보니 담장도 낮고 인심도 좋은 것 같아. 그런데 사회에 나가 생존경쟁이 치열해질 때 살아남으려면 착한 것만으로는 안되는 거야. 열심히 공부해서 너희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때만이 가능한 거지"라며 같은 취지의 훈화를 3년 내내 했다고 한다. 그 결과 당시 같은 해에 120명이 서울대에 들어갔고, 김 전 장관을 포함한 16명이 법대에 합격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김 전 장관이 대학을 졸업한 다음 해였다. 김 전 장관은 "제가 합격했을 때는 10명을 뽑았어요. 사법시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쟁을 뚫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얼마지 않아 그 기록이 깨졌습니다. 5명을 선발했거든요" 하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시 마지막 정리를 천안 천북국민학교 근처의 은석사라는 곳에서 했었는데, 그 사찰 위에 어사 박문수의 묘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아래 은지리 마을에는 박 어사의 후손들이 모여 산다고 하더군요. 신기한 것은 박 어사의 묘에 불개미가 그렇게 많았다는 점이죠. 송충이들을 다 잡아 먹어서인지 주변에는 송충이가 한 마리도 없었고, 최근에도 가 봤는데 여전히 그러하더군요."

김 전 장관은 이어 "저를 포함해 사시에 합격한 고교 동기 7명 가운데 6명은 모두 판사로 가고, 저만 검찰로 빠졌습니다. 아버지 제자가 검찰 고위직에 계셨는데, 그 분이 제 성격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검사를 지원하라고 권고하셨거든요" 하고 밝혔다.

대전 성모병원의 윤주병 신부는 김 전 장관의 합덕초등학교 동창이고, 지금도 동창 20여명과는 매월 1회씩 모여 골프를 즐긴다. 고교 동창으로는 가재환 변호사, 임대화 전 특허법원장 등이 있고, 심대평 충남도지사와는 대전고 시절 1학년 5반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좌우명을 지론으로 삼고 있는 김 전 장관은 옛일을 회상해 보는 내내 행복해했다.?

<약 력> ▲1941년 7월 7일 충남 아산 출생 ▲1959년 대전고 졸 ▲1963년 서울대 법대 졸, 1966년 동 사법대학원 졸 ▲1997년 고려대 컴퓨터대학원 수료, 98년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 수료(법학석사), 2001년 법학박사(동국대) ▲1966년 육군 사단 검찰관 ▲1968년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 법무사 ▲1969∼1979년 대전지검·인천지청·정읍지청·서울지검 검사 ▲1982년 서울지검 동부지청 부장검사 ▲1992년 대전지검 검사장 ▲1993년 법무부 검찰국장 ▲1993년 서울지검 검사장 ▲1994년 법무부 차관 ▲1995년 서울고검 검사장 ▲1997∼98년 법무부 장관 ▲1998년 한백합동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현) ▲2001년 동국대 법학과 겸임교수(현)[상벌]홍조·황조·청조 근정훈장

[저서]'수사기록의 열람·등사와 증거 개시', '형사사법 개혁론'(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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