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스키외(1689∼1755)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에서 '개인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사법·입법·행정의 3권으로 나뉘어 서로 규제·견제함으로써 비로소 확보 된다'고 했다. 그의 3권분립론은 사법부의 독립은 물론 자유주의 입장에서 권력분립을 기초로 한 법치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법이 지탱되는 것은 그것이 공정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곧 법이 갖고 있는 권위의 불가사의한 기초이며 이밖에 다른 기초는 전혀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 이념은 오늘날 전 세계 많은 헌법에서 이를 규정하고 있다. 법치를 기본으로 한 사법부의 독립성을 명문화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사법부가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과 관련해 홍역을 앓고 있다. 신 대법관을 엄중 경고 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려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조치에 대해 일선 판사들이 즉각 반발했다. 사실 현직 대법관이 경고조치를 받은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한다. 사법개혁 때마다 선봉에 섰던 독립 재판부인 단독판사들은 신 대법관의 처사는 명백한 재판권 침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단순히 신 대법관의 사퇴문제를 떠나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일선 판사들은 연일 신 대법관의 위법·부당성을 내세우며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서울에 이어 인천, 부산, 울산, 수원, 광주 등 전국으로 확산되며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또 한 번의 '사법파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지 심히 염려스럽다.

지금까지 사법파동은 총 4차례 있었다. 사법파동의 시초는 1971년 서울지검 공안부가 검찰이 기소한 공안사건들이 법원에서 잇따라 무죄로 판결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일부 판사들에 대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송영장을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150명의 판사들이 사표를 제출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진화에 나섰다. 결국 물의를 빚은 검사들이 물러났고 판사들이 사표를 철회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2차 사법파동은 1987년 노태우 정부가 신군부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을 법원 수뇌부에 재임명하면서 시작됐다. 판사들의 반발에 부딪치자 유임을 시도했던 김용철 대법원장이 퇴진했다. 3차 사법파동은 1993년 문민정부의 사법부 개혁안에 대해 법관들이 반발하면서 시작됐고 이로 인해 김덕주 대법원장이 옷을 벗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4차 사법파동은 2003년 대법관에 남성들만 임명되는 관행에 반발에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 파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심지어 '제5의 사법파동' 조짐마저 보인다. 4차례의 사법파동을 겪으면서 상실감은 실로 컸다. 또 다른 '회오리'는 모두에게 상처가 될 뿐이다. 대법원이 부랴부랴 재판권 독립 보장을 위해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키로 했지만 어떠한 해법을 찾을 지 아직은 미지수다. 사법부가 완전히 독립되고 재판권이 보장돼야 법치가 바로 선다. 지난날 얼마나 많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사법부 독립을 주장 해 왔던가. 하물며 사법부 내부문제로 재판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법치의 퇴보다. 이젠 더 이상 미뤄서 될 일이 아니다. 대승적 차원에서 용단이 필요할 때다.

강춘규 편집부 차장 chgk@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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