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권 前 충남도지사

어김없는 시공(時空)의 역사는 또 한해의 추석을 맞는다. 예부터 추석은 한가위라 하여 명절 중의 명절로 꼽았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들엔 온통 풍요로움만 가득하기에 선인들은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해마다 추석 때만 되면 귀향인파로 전국 도로가 전쟁을 치른다. 올 추석도 고향을 찾는 인파가 2000만명을 넘을 것이란 예상이다.



삶을 위해 뿔뿔이 헤어졌던 형제자매들이 모두 모여 오랜만의 단란함에 웃음꽃 피우는 행복이야말로 아름다운 추석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젠 아름답던 추석 풍경도, 전통의 미풍양속도 모두가 옛날 같지 않게 변해 간다. 더구나 올 추석은 더욱 썰렁하다. 생각만큼 밝고 풍성하지도 못하게 됐다. 유난스레 잦은 비 때문에 온갖 농작물이 병충해로 시름하고 있는데다 철마저 일러 익은 과일도 없고, 여문 곡식도 없다. 햇과일, 햇곡식으로 만들어 나누어 먹던 넉넉한 음식 인심마저도 예년과 달리 각박하게 됐다.

이렇듯 넉넉함이 줄어드니 따뜻한 정마저 식을 수밖에 없다. 더 큰 원인은 모두가 어려워진 경제형편 때문이다. 농민도 도시 서민도 사정은 비슷하다.'더도 말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라는 속담이 무색할 지경이다.

농민들은 죽도록 농사를 지어도 보람을 기대할 만한 작목이 없다. 국가정책이나 국제적인 경쟁력 등 근본적으로 농사환경이 열악해지고 있다. 또 농자재, 생필품 등 공산품값은 천정부지로 뛰면서도 농산물값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논농사도? 밭농사도 또 목축업도 낙농업도 모두가 어렵긴 마찬가지다.

작년 말 현재 농협에서 집계된 농가 가구당 평균 부채액만도 2000만원을 넘어 3000만원에 육박한다. 농촌 농민들은 모두 빚더미 속에 묻혀 있다. 농민들은 이제 즐거워야 할 명절마저도 무겁고 침울하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풍경이, 넉넉하던 추석 풍경이 옛날 같지 않을 수밖에 없다.

도시 서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소비나 투자가 위축되고, 생산이 감축되다 보니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 서민 경제는 더욱 졸아들었다. 명절 때 상여금은커녕 임금도 제대로 못 받은 경우도 허다하다.

6일 현재 대전·충남 중소기업들 중에서 임금마저 제때 지급하지 못한 체불액만도 무려 43억원에 이른다는 통계다. 집계되지 않은 일용 노동자들의 체불 임금까지 합치면 임금 체불액 규모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민 경제가 이 지경까지 이르다 보다 활기가 넘쳐야 할 대목 분위기도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추석을 맞아 더욱 쓸쓸하고 외로운 곳이 또 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 수용시설에서 명절을 맞는 이웃들이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으레 찾아들던 온정의 손길마저도 뚝 끊어졌기 때문이다.정치집단은 날마다 정쟁만 일삼을 뿐 도탄에 빠진 민생경제는 뒷전이다. 쉴 날 없는 노사분쟁과 이념분쟁은 어려워진 서민경제를 더욱 불안하게 몰아가고 있다. 개혁은 떠들어도 개혁은 없고, 날마다 참여는 떠들어도 그들만의 잔치다. 누가 이런 추석을 일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올해도 어김없이 한가위 달은 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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