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금산으로 떠나는 역사나들이

▲ 금산군 이치대첩지 전경. 금산군청 제공

금산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조상들의 혼과 지혜가 담겨져 있는 역사적인 현장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1500명의 군사로 왜군 2만 명을 무찔렀던 이치대첩지가 있고 의병 700명의 유해가 안치된 칠백의총이 있다. 최근에 대전·충남 최초로 6·25전사자의 유해가 발굴된 육백고지도 우리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곳이다.

-이치대첩지

대둔산 기슭에 위치한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전지인 이치대첩지는 국난극복의 현장에서 빛을 발한 조상의 얼과 지혜, 호국정신이 담긴 역사적인 곳이다.

이치대첩지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1500명의 군사로 왜군 2만여 명을 무찔러 임진왜란 전체 전투의 전세를 역전시킨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행주대첩지와 진주대첩지에 못지 않은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 부족으로 외면 당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 역사적 고증이나 발굴 등이 이뤄지지 않아 관광코스나 프로그램은 없지만, 권율 장군이 10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싸웠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여행한다면 조상들이 혼과 호국정신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육군사관생도의 성지순례코스로 활용되기도 했었다.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에 권율 장군의 위패와 기념비가 모셔져 있으며, 지난 1966년부터 40여 년간 고(故) 박관옥(권율 장군을 기리는 마을주민들의 모임인 화수회장) 씨가 매년 현충일을 맞아 진산면 묵산리 이치대첩지 비각 앞에서 민간 주도로 지내오던 이치대첩 기념제를 지난 2006년 금산군 진산면사무소가 주관했고, 2007년부터는 군 행사로 확대해 매년 8월 26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현재 금산군이 이치대첩지에 대한 국가사적 지정과 성역화를 추진하고 있어 새로운 관광자원 개발이 기대되는 곳이다.

-칠백의총

700명의 순국의사들의 유골이 안치된 칠백의총(사적 제105호. 금성면 의총리)도 호국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1만 5000명의 왜군들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 정벌을 위해 금산으로 집결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의병장 조헌 선생과 승장 영규대사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들은 순결했고 일본군도 많은 피해를 입고 호남평야 정벌을 포기했다. 이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김승절이 700명 의병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명한 곳이다. 역사적 배경이 이치대첩과 연결된 곳이기도 하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정비됬으며, 광복절이나 3·1절 같은 국경일에는 참배객들이 찾아 선얼들의 높은 뜻을 가슴에 되새기는 곳 중에 하나다. 대전에서도 가깝고 넓은 잔디밭과 조경이 조성돼 있어 나들이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 육백고지

-육백고지

금산 백령성 육백고지(충남도 기념물 83호. 남이면 역평리와 건천리)는 6·25 당시 전쟁에서 패배한 북한국 패잔병과 남로당 소속 불온세력들이 약탈과 방화, 피습 등을 위한 근거지를 구축한 곳으로, 당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과 경찰 병력이 합동공비토벌작전을 벌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 전투로 육백고지에서 적군 2287명이 사살·생포됐고 아군도 투입 병력 200여 명과 민간이 70명 등 270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금산군이 지난 2007년 호국용사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백령성과 연계한 관광자원화를 위해 재정비했다. 현재 전승탑을 비롯해 충혼비와 건립기, 참전공적비 등이 들어서 있다.

지난 3월에는 육군이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해 대전·충남지역에서는 최초로 6·25 당시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6구의 유해 발굴했다. 또 6구의 유해와 함께 탄피 201발과 회중시계와 손목시계 각 1개, 멜빵고리 1개, 전투화 3족, 수저 1개, 만년필 1개, 고무링 1개 등 200여 점의 유물도 발굴됐다. 육백고지는 금산읍에서 금산산림문화타운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가는 길에 잠시 둘러보는 것도 괞찬다.

-보석사

신라 헌강왕 11년(885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했다는 보석사(남이면 석동리)는 무려 1123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해 불에 타기도 했지만 명성황후가 중창해 원당으로 삼기도 했었다. 보석사란 이름은 절 앞산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보석사에는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었다는 수령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40m에 흉고 둘레 10.4m로 수령만큼이나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365호로 지정돼 있으며 보석사에서 매년 단오에 ‘보석사 은행나무대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8·15광복, 6·25전쟁, 10·26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등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어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찰로 들어서는 진입로는 200여m의 전나무숲길이 장관이다. 한때 한석규가 등장하는 휴대전화 TV광고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던 이곳에선 산사와 어울리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금산=나운규 기자 sendme@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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