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이미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참으로 위대한 기업인이었음을 생각했다.

정주영 같은 기업인이, 이 경제난 시대, 100명만 있었어도… 하는 아쉬움도 절절했다.

1980년대, 이집트는 북한과 긴밀한 관계였고 북한의 군인들이 이곳에 파견돼 군사훈련을 시킬 정도였다. 남한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 벽을 뚫은 것은 우리 정치인들이 아니라 기업인들이었다. 그 무렵 정주영 회장은 이집트를 방문하였다.

"이집트에 경찰차가 몇 대나 필요하오?"

이집트가 순찰용 차량을 구입 못해 곤란을 겪고 있음을 알고 던진 질문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그 자리에서 이집트 경찰이 필요한 차량을 모두 무상으로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즉시 시행했다. 마치 정 회장이 직접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갔듯이 현대차들이 사막길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이집트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졌으며 지금도 북한대사관이 나와 있지만 거의 잊혀진 존재가 돼 버렸다. 카이로만 해도 우리 교포가 2000명이나 되어 위치 좋은 곳에 코리아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것에 비해 북한은 대사관직원 몇 명에 불과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카이로 시내 어디를 가나 현대차, 대우차가 압도적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프라이드가 거리를 달린다. 그러니 정주영 회장의 뱃심 좋은 경영수법과 그 탁월한 기업정신에 감탄할 수밖에.

자동차 이야기가 나왔으니 세계에서 가장 교통질서가 엉망인 나라가 이집트일 것이다. 차선도 없고 신호도 없으며 마구잡이로 끼어들고, 뱡향 바꾸고. 그러면서 경적을 귀가 아프게 울려 댄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깜짝깜짝 놀랄 상황이 계속 발생되는데 사고로 이어지지 않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이집트의 진수가 있다. 무질서 속에 질서를 찾아가는 지혜-이것이 4000~5000년 전 사막위에 찬란한 문화를 이루어낸 정신이 아닐까? 물론 어쩌다 사고가 나기도 한다. 그러면 경찰을 부르거나 큰 소리로 싸우는 게 아니라 웬만하면 '인 슐라'하고 헤어진다.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신의 뜻'으로 상황을 감수하고 관용을 베풀며 산다.

현재의 무바라크 대통령이 30년을 통치하고 있고 계엄령이 30년을 이어와도 불평없이 가장 개방된, 아랍국가로 사는 것 역시 '인 슐라' 정신인지 모른다.

카이로 거리에서 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많은 차들이 세차를 않는 것이다. 고급차를 제외하고는 예외 없이 차가 더럽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거기에도 이집트의 문화가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데다 바람이 많아 카이로는 언제나 뿌연 흙먼지로 건물마저 충충하다. 그래서 바깥의 색깔은 언제나 어두울 수밖에 없고 안쪽의 색깔은 화려하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옷처럼 가볍고 요염하기도 하다.

흙바람이 만든 문화- 그 대표적인 것이 피라미드, 그리고 스핑크스다. 그 옛날 파라오들은 웬만한 시설들이 오랜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흙바람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니 자신이 죽어 묻힐 피라미드를 산처럼 크게 건설할 수밖에 없었고 흙바람을 막아야 할 엄청난 돌이 필요했으며 그것을 조립할 기술, 기하학, 천문학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흙바람은 세계사적 문화를 만들어 냈으나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한 문화였다. 이집트가 과거 찬란한 역사를 갖고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삶을 사는 것은 '죽은 자의 문화'에 충실했던 문화 때문이 아닐까?

카이로=변평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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