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속으로]돈을 그린 화가였지만 한때 초가집서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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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돈을 그린 화가였지만 한때 초가집서 살았죠
  • 김항룡 기자
  • 승인 2009년 03월 09일 18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9년 03월 10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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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원권 신사임당 영정그린 이종상 화백(예산 출신)
   
 
   
 

“한 번은 동네가게에서 물건을 샀는데 거스름 돈으로 5000원 권을 내주는 거야. 내가 그린 5000원 권이라는 것을 몰랐는지 아무렇지 않게 내 주는데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았어.”

6월부터 유통될 5만 원권 화폐에 담긴 신사임당의 영정을 그린 것이 밝혀지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종상(71) 화백을 인터뷰하기 위해 지난 7일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매표소에서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돈을 건내려는데 기자의 지갑에도 그가 그린 5000원 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화폐에 담긴 율곡 이이의 모습을 잠시 응시하며 매표원에게 돈을 건냈고 곧 기차표 두 장이 손에 쥐어졌다. 이종상.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대표예술인이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미술을 하기에는 모든 환경이 열악했지만 열정 하나로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 꿈을 이뤘다. 미학과 철학, 실기를 두루 갖춘 예술가로도 알려진 그는 독도, 고구려 벽화 등을 소재로 한 작품활동을 통해 민족적 가치와 자부심을 일깨워 주는 일에도 앞장서 왔다.

그는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작가다. 화폐처럼 세밀함이 요구되는 작품부터 72m의 거대벽화에 이르는 대형작품까지 그의 예술세계는 드넓다. 그는 이 같은 작품세계에 대해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은 얼핏보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라며 “거대한 작품을 세밀하게 하지 않으면 무너지거나 변형되고 만다”고 말했다. 한 시대의 문화적 척도로 여겨지는 화폐를 두 번이나 그린 이종상 화백을 서울 평창동의 한 호텔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돈은 한 시대의 문화척도

-5만 원권 화폐가 오는 6월부터 유통될 예정인데.

"서른 살 중반 화폐 영정을 그려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느낌은 아닙니다. 다만 처음 그렸을 때 스승님의 당부가 아직도 선해요. 역사적인 인물을 그린 만큼 작가의 몸과 마음가짐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셨어요. 자칫 아무렇게나 행동하다간 화폐를 모두 수거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충고였고 그 말씀을 신조삼아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나요.

"돈의 가치만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액면가 즉 동그라미가 몇 개냐가 더 중요하지요. 돈을 물질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제는 열량짜리도 안 돼'라는 말보다 기분 나쁜 말이 있을까요. 백원·천원·만원짜리란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이 정말 짜리~잇(뜨끔) 해요. 그런데 돈 하나를 그릴 때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아셨으면 좋겠어요. 물량적 가치보다 그 뒤에 숨어있는 문화적 가치를 동시에 생각해달란 이야기입니다. 화폐는 경제적 소통을 뒷받침하는 도구지만 국민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척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겨진 화폐를 보면 내 자신이 구겨진 것 같아요."

◆소매깃만 스쳐도 3대가 부자된다는 말에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 많아

-5000원 권 화폐 율곡 이이의 영정을 그린 뒤 달라진 것은.

"돈을 그린 사람의 소매깃만 스쳐도 3대가 부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조차 제가 화폐를 그렸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죠. 한 언론사의 오보를 바로잡기 위해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알려진 이후엔 5000원 권에 사인을 받으려고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초인종을 없앤 일도 있었습니다. 상업적인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했는데 돈이 궁할 때도 직거래는 하지 않았어요. 화단의 유통질서가 깨어질까 우려에서 말입니다."

-돈에 쪼들려본 경험도 있습니까.

"인간의 소유욕은 한과 끝이 없기 때문에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국전 심사위원이면서도 서울 불암산 밑 초가집에 살았어요. 당시 서울의 한 채 집값이 400만~500만 원 할 때였는데 20만 원 집에 살았었습니다. 전기세를 못내 촛불을 켜고 생활했어요. 형편이 무척 어려웠지만 그래도 전 돈을 그린 화가였고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것 같아요."

◆잘 쓰는 법 가르칠 때 경제도 살아날 수 있어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점점 어려워질수록 '돈에 울고 돈에 웃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돈이 참 중요한 시대인데 돈보다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소유하려고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평생 동안 버는 것, 모으는 것만 배웠을 뿐 쓰는 것에는 인색하죠. 돈을 버는 목적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 돈 10원이라도 꼭 필요한 이웃이 있으면 나누라고 말해야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는 것,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수단이 될 지언정 목적이 아니듯 더 늦기 전에 살아가는 목적 돈 버는 목적을 가르쳐야 합니다."

-유통되고 있는 5000원 권 화폐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제 분신 같습니다.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으로 5000원 화폐를 받을 때가 있죠. 그런데 제가 그린 것을 모르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제가 그렸다고 얘기할 수도 없잖아요.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도 너무 ‘무관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 어색할 때도 많았고, 혹 구겨진 돈을 보기라도 하면 내 자신이 구겨진 것 같아 지갑에 넣기 전 빳빳하게 펴서 넣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충청도 가장 가부장적 사고, 가족들 힘들게 한 것 같아 미련 남아

-이론과 실기를 두루 갖춘 화가로 빈틈없다는 평이 많습니다. 본인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습니까.

"한두 가지가 아니죠. 스승님께서는 영정을 그릴 때 정면이 아닌 뒤에서 그려야 한다고 늘 당부하셨습니다. 인격은 앞이 아닌 뒤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첫째 인간됨에서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늘 가족들에게 가부장적인 것을 내세웠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은 가족들에게 아양도 떨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해도 그런 일은 늘 지 엄마한테만 얘기해요. 이럴 때면 좀 더 일찍 그(가부장적) 생각을 버릴 걸 후회하곤 합니다."

-부족한 점이 또 있습니까.

"화폐 영정과 같은 세밀한 작품과 213톤의 벽화 작품 등 거시적 작품을 두루하고 있지만 이런 일에 집중하다보니 정작 자신과 관련된 일은 잘 못합니다. 한 번은 10년이나 타고 다닌 자동차의 번호를 몰라 주차장에서 곤혹을 치른 적도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차 번호를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집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았어요.(웃음)"

◆그림은 가장 쉬운 시각예술

-선생님의 예술세계에 대해 복잡하고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그림은 어려운 것 하나도 없어요. 쉬운 것 할 때 ‘그림 그리듯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림은 쉬운 것이에요. 시각언어 아닙니까. 그림을 앞에 두고 감상법 운운하는 것은 맹물을 가져다 놓고 먹는 법을 소개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보이는 만큼 느끼면 된다는 게 그림에 대한 감상철학입니다."

-대전, 충남·북 출신 인사 중 친하게 지내는 분이 있으십니까.

"너무 많은데 거의가 고등학교 친구들입니다. 큰 일을 하는 친구도 많아 일일이 얘기하기 힘듭니다. 그 중 치과를 운영하는 조봉현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고등학교 시절 저와 같이 미술공부를 한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부모님께 효도하느라 의대에 갔고 나는 불효하며 미술대학에 갔어요. 그 친구는 늘 나를 부러워하는데 지금도 가끔은 다 때려치우고 그림 배우겠다는 합니다. 친구 때문에 이빨이 아플 땐 꼭 대전까지 내려가요."

◆미술관 건립 대전시민 6만 명 서명운동,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일

-‘일랑(이종상 화백 호)미술관’이 대전에 들어서길 바라는 대전 시민들의 서명운동이 있었습니다. 생존 작가 미술관 건립을 위한 역사적인 일로 평가되고 있는데….

"대전 시민들에게는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살아있는 작가의 전람회를 보시고 미술관 건립 서명운동을 벌였다는 것은 고무적인 문화운동이고 외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웬만큼 불리해도 대전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얘기 없이 해를 넘기게 돼 아쉬워요. 늘 감사히 생각하고 있고 어디로 가든지 그 분들의 성의를 잊지 않을 겁니다. 6만 개의 돌에 그 분들의 서명을 음각한 작품으로 보답하고 싶습니다."(작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가난해서 이과를 선택했으니까 과학자가 됐을 것 같아요. 또 대학 등록금이 없어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기도 했는데 갑작스런 늑막염 때문에 합격하지는 못했죠. 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과학자(건축가)나 군인으로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데 본인은 언제였던 것 같습니까.

"그림에 빠져 있는 제게 어머니는 ‘그림이나 그리고 공부는 안하느냐’는 말 대신 ‘너는 그림공부가 질리지 않느냐’고 묻곤 하셨습니다. 그림을 공부라고 생각해주셨고 늘 힘이 돼 주셨어요. 한 번은 아버지의 현미경을 다 뜯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혼을 내는 대신 연장을 사주시면서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뜯어봐라. 다만 설명서에 맞게 다시 쓸 수 있도록 해 놓거라” 테라바이트급 컴퓨터를 쓰고 거대한 작업에 도전할 수 있었던 힘이죠. 대전고 시절 박관수 교장 선생님의 영향도 컸습니다. 그림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너희들 시대가 되면 먹고 사는 것은 해결될 거야. 너희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며 미대에 가라고 당부하셨지요. 제 주변의 작은 말과 격려가 큰 기회이자 새로운 인생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지금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있다면.

"가장 후회되는 것은 작품이죠. 작품은 자식과 같은 것으로 제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시집보낸 딸자식 같은 것이 작품입니다. 사랑하지만 내가 끼고 살 수가 없어요. 시집을 보내야 해요. 이놈이 시집살이 잘 하나, 혹 무너지거나 변색하지 않나 걱정이 많아요. 늘 후회스럽죠."

◆징검다리 놓았을 뿐 완성한 건 아무것도 없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평가는 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성한 것처럼 평가하지는 말아줬으면 해요. 끝도 한도 없는 길에 그냥 징검다리 하나 놓은 사람으로 평가되길 바랄 뿐이죠. 그리고 그 징검다리가 물살이 조금 세다고 해서 무너지는 다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흔들리지 않는 징검다리 놓고 누군가가 또 다음 징검다리 놓겠죠. 그것이 작가의 길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길 그는 “고향에서 올라 온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있냐”며 서울역까지 직접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서울역에서 가는 길 그는 이런 저런 얘기를 더 들려 주었는데 자신이 ‘스피드 광’이라는 고백도 그 중 하나였다. 대학 재직 시절 1200cc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돌며 진경(실제 경치를 그림으로 그리는 일)을 했던 추억과 기계에 밝아 동료들로부터 차 수리를 도맡었던 일 등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옛 추억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서울·글=김항룡 기자 prime@cctoday.co.kr

사진=신현종 기자 shj0000@cctoday.co.kr

이종상 화백은?

193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학교 재학시절 원로화가인 김철호 화백으로부터 미술을 처음 배운 뒤 서울대 회화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서울대미대 동양화과 교수, 서울대 박물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양화가인 아내 성순득(68) 여사와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장녀는 국립국악원 연주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대가 한 집에 사는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원형상이 있으며, 1997년 프랑스 루브르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역사를 소재로 한 72m 규모의 거대 벽화를 선보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전남 보성군에 위치한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에 213톤 규모의 옹석벽화 ‘원형상 백두대간의 염원’을 제작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