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투 금산 이치대첩]권율장군, 1500명의 군사로 2만 왜군 무찔러

▲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전지인 이치대첩지 전경(오른쪽)과 이치대첩비.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전지인 이치대첩지(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국가사적 지정과 성역화사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행주대첩지와 진주대첩지에 못지 않은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 부족으로 외면당하고 있어 소중한 문화재 유실의 우려를 낳고 있다. 금산군이 이치대첩지에 대한 사료 수집과 고증에 힘쓰고 있지만 보다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을 위해서는 국가사적 지정과 정부차원의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군은 지난 1999년 이치대첩의 역사적 의의 규명을 위한 학술회를 개최하고 책자인 ‘임진왜란과 이치대첩’을 발간하는 등 고증에 주력해 왔다.

1966년부터 40여 년간 고(故)박관옥(권율 장군을 기리는 마을주민들의 모임인 화수회장) 씨가 매년 현충일을 맞아 진산면 묵산리 이치대첩지 비각 앞에서 민간 주도로 지내오던 이치대첩기념제를 지난 2006년 금산군 진산면사무소가 주관했고 2007년부터는 군 행사로 확대해 매년 8월 26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현재 이치대첩지는 육군사관생도의 성지순례코스로도 활용되고 있다.

군은 지난 2007년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지만 사료 부족으로 반려됐다. 국난극복의 현장에서 빛을 발한 조상의 얼과 지혜가 담긴 문화재 보전을 위한 노력이 필요로 하고 있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최초의 육전승전인 이치대첩(梨峙大捷)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1500명의 군사로 왜군 2만여 명을 무찔러 전세를 역전시킨 전투다. 이 전투가 벌어진 이치대첩지는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대둔산 중허리 부근으로 임진왜란 당시 골짜기에 배나무가 많아 이치(梨峙)라고 불리었다.

골짜기가 깊고 험한 이치는 왜군이 전라도 호남평야로 진출하기 위해 넘어야할 유일한 통로이자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1592년) 7월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왜군은 군량미의 현지보급을 위해 적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가 거느린 약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대둔산 이치고개를 넘어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이를 감지한 당시 전라도 도절제사였던 권율 장군은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관군·의병 1500여 명을 이끌고 이치고개에 진지를 구축, 호남 진출을 시도하던 왜적 2만 명을 섬멸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진주·행주대첩보다도 빠른 육전 최초의 승전고를 울린 전투가 이치대첩이다.

이 전투로 왜군의 호남 진출은 수포로 돌아갔고 군량미를 확보하지 못한 왜군의 전력은 약화돼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치대첩이 진주·행주대첩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얘기다.

반면 권율은 이치대첩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수원 독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서울 수복작전을 개시, 행주산성에서 3만 명의 왜군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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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지정 필요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전지이자 왜란 초기 전세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로 역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 10분의 1도 되지 않는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를 지형을 이용한 전략과 호국정신으로 승리를 이끈 승전지로 국란극복의 생생한 역사적 현장이다.

특히 조상의 얼과 지혜, 호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민족의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문화재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인근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등 700명의 의사가 묻힌 칠백의총(금산군 금성면, 사적 제105호)이 자리하고 있어 교육장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1963년에 문화재로 지정된 행주대첩지와 진주대첩지의 화려함에 가려 빛을 바래며 묻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금산군이 권율 장군의 업적과 승전일을 기리기 위해 매년 기념제를 지내며 체계적인 관리에 힘쓰고 있지만 국가 차원의 관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 1999년 금산군과 충남대학교가 공동으로 개최한 학술회에서는 이치대첩이 임진왜란 초기 육전에서의 전세에 미친 영향과 진주·행주대첩에 미친 영향 등이 입증되기도 했다.

당시 충남대산학연연구관에서 열린 학술회는 한림대 최영희 석좌교수와 충남대 국사학과 이상기 교수가 이치대첩의 역사적 의의와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역사적 사료로는 관선자료로 선조수정실록(1609년)이 있으며, 문집류로 조선시대 선조 때 남원(南原)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지은 난중잡록(1638년)과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1776년), 도원수권공행장(1599년), 만취당실기(1890년) 등이 있다.

권율 장군의 이치에서의 업적을 새긴 권율 장군 이치대첩비(충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5호)는 1902년 금산 금성면 금곡에 세워졌던 도원수권공 이치대첩비가 일제시대인 1940년 일본경찰에 의해 파괴돼, 후손들이 1964년 이치가 바라다 보이는 진산면 묵산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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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대첩의 의의

이치대첩은 사실 진주·행주대첩에 버금가는 대단한 전투였으며 그에 못지 않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른 전투의 화려함에 가려 묻혀져 버린듯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이치대첩의 승리로 왜군의 군량미 보급이 차단했고 이로 인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입지가 불안해져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치대첩의 승리는 임진왜란 초기 전세를 뒤바꿨다는 의의는 지닌 전투이다.

또 1500명대 2만 명이라는 절대적 숫적 열세에도 지형을 이용한 전략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정신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승리로 이끈 조상들의 정신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왜군도 이치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은 물론 최고의 전투로 여겼다고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의의와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치대첩지는 그동안 외면돼 온 것이 사실이다.

조상들이 보여준 호국정신과 업적을 찾아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산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이치대첩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토론회

이치대첩의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토론회가 오는 6일 금산다락원에서 개최된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1500명의 군사로 왜군 2만여 명을 무찔러 전세를 역전시킨 이치대첩지(梨峙大捷址)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전승 보전하고 청소년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상기 교수가 권율 장군의 거병과 방어진 편성 등 이치대첩의 전개 과정을 발표할 예정이다.

또 이명수 의원과 육본 군사연구소 장삼열 대령,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변평섭 원장, 박동철 금산군수 등이 패널로 참석해 이치대첩의 국가사적 지정을 위한 토론을 벌일 계획이다.

권율 장군의 업적과 이치대첩지에 대한 고증에 주력해온 군은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국가사적 지정을 재추진할 계획이다. 조상들의 호국정신과 지혜를 지닌 지역의 문화재를 보전하고 민족의 교육장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금산=나운규 기자 sendme@cctoday.co.kr

사진=금산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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