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 행자부 지방분권연구단장

영국의 한 열차 안.

어느 부인이 한 중년 남자 옆에 앉게 되었다. 열차가 출발되고 부인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좌석에 놓아둔 핸드백이 없어진 걸 알았다.

주변에 별 손님도 없어 당연히 옆 좌석의 허름한 남자에게 의심이 갔다. 부인은 여객전무를 불러 아무래도 옆 손님이 자기 핸드백을 가져간 것 같으니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여객전무는 실례한다고 하고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손님의 가방과 몸수색까지 해 보았지만 핸드백은 나오지 않았다. 여객전무와 부인은 핸드백을 찾느라 선반 위, 좌석 밑 할 것 없이 수선을 떨며 찾다가 결국 화장실에서 핸드백을 찾아내고 말았다.

공연히 무고한 사람을 의심했던 부인은 무안해서 옆의 손님에게 사과를 하였다. '사람을 잘못 보고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수모를 당했던 손님이 말했다.

'뭘요, 괜찮습니다. 저도 사람을 잘못 본 걸요. 부인은 저를 도둑으로 잘못 보고, 저는 부인을 숙녀로 잘못 보았지요' 부인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떠했을까?

상상만 해도 나는 벌써 낯이 뜨거워진다. 눈에 보일 그 담지 못할 상스러운 욕설에 치켜뜬 눈꼬리 하며 쇳소리의 고성….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야말로 영어가 프랑스어에 비해 야만족의 언어라고 하는 콤플렉스를 그의 아름답고 격조 높은 작품으로 완전히 씻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언어는 그 국민의 문화적 결정체요, 그 사회의 시대상이요, 그 사람의 인격적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고상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쓰는 언어가 상스러울 리 없다. 또한 격조 높은 사회에서 나누어지는 대화가 저속할 리 없다.

언어는 충직한 앵무새와 같아서 주인의 생각만을 중얼거리기 때문이다. 말은 생각의 시녀(侍女)요, 그 사회의 사고(思考) 수준의 척도인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만연되고 있는 언어행태는 우리 사회의 사고의 건전성과 품격에 심각한 우려를 품게 한다.

어린이,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욕설이 너무도 난무하고, 그 표현과 표정은 너무 거칠고 직설적일 뿐만 아니라 저속하다.

특히 근자에 성공했다는 몇몇 한국영화 중의 저 참을 수 없는 상스러운 대사는 가히 자녀들과 함께 감상하는 것이 피차 수치스러울 정도다. 그들이 만약 욕설도 연기이고,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면, 욕설을 시녀로 삼고 있는 그들의 창의성의 원천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마녀가 내뱉을 때마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뱀과 개구리 같은 것일 때 마녀를 사로잡고 있는 내면의 주인공은 사악함과 저주다.

저속한 욕설은 상대방을 분노하거나 흥분시킬 수는 있어도, 반성하게 하거나 뉘우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아한 모독은 수치심을 유발하여 사람을 자살에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버나드 쇼우는 현실에는 맞지도 않는 이상적인 이론만 주장하다가 막상 일을 그르쳐도 책임지지 않는 교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명한, 우아한 욕설을 한 적이 있다.

'He who can does; He who cannot teaches.'(할 줄 아는 자는 일을 하고, 할 줄 모르는 자는 가르친다)

교육자들에 대한 어떠한 힐난과 비판보다도 버나드 쇼우의 이 한마디에 영국의 교육계는 크나큰 모독과 충격을 받아 발칵 뒤집혔었다.

욕설이 부쩍 난무하고 있는 요즘 우리 사회. 말이 곧 사람이라고 했던 선현들의 말을 되새겨 보면서, 품격 있는 말을 골라 쓰는 사회의 우아한 긴장감을 아쉬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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