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본사고문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는 계룡산 수통골 아래 명당으로 알려진 학하리 마을에서 태어났고 그의 유택은 천안시 북면에 자리잡고 있다.

영조(英祖) 임금 때 그는 누추한 모습으로 전라도 지방을 순시하다 지금의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마침 마을에 회사정(會社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박문수가 이곳에 앉아 쉬려고 하는데 마을의 어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의 오랜 전통을 이어온 대동계(大同契)가 열리는 날이었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라는 신분을 숨긴 채 누추한 모습으로 그들의 회의진행을 지켜보다 갑자기 술상을 차려오라는가 하면 이것저것 시비를 걸었다.

참다못해 대동계원들은 박문수가 자리를 더럽혔다며 그가 앉았던 자리를 대패로 깎아냈다. 그리고 매질을 하려고 하자 비로소 박문수는 자신이 암행어사임을 밝히고 마패를 보여 풀려날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온 박문수는 영조 임금에게 전라도 영암의 구림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했다.

영조는 임진왜란을 겪고나서 민심이 황폐화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차라 매우 기쁜 마음으로"그렇게 향약(鄕約)이 잘 지켜지는 마을이 있다니 반갑소"하며, 임금 자신도 그 대동계에 가입시켜 달라고 했다.

구림마을 대동계 회원들은 임금의 가입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사방 20리 안에 거주하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다'는 규약에 따라 가입을 거부했다. 대단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가입을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려 대동계원들은 궁여지책으로 정원 70명에 1자리를 남겨두고 69명으로만 계를 이어왔다.

지금도 500년 가까이 이곳 대동계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임금의 요구까지 거절하는 원칙으로 마을의 전통을 지켜왔다는데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그런데 최근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의 부전(浮田)이라는 마을에서도 전라도 구림마을 대동계만큼 오래된, 그러니까 500년 세월의 값진 대동계 문서가 세상에 알려져 학계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오늘 암행어사 박문수가 보면 박수 칠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부전동(뜸밭) 대동계 회원들이 관련 문서들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기탁함으로써 밝혀졌다.

문서의 기탁은 자료의 훼손을 막고 영구적인 보존과 관리를 하게 돼 조선시기 사회체계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할 뿐 아니라 향토사 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게 하려는 마을 원로들의 뜻에 의한 것.

공주 우성 부전대동계는 조선전기에 설립된 것으로 충남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고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암행어사 박문사가 감탄하여 임금에게 보고한 구림마을 대동계보다 더 오래된 것이 될 수도 있다. 특히 1663년의 동계중수는 당시 양반지배에서 떨어져 나가는 하층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의도도 보여진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이렇듯 중요한 부전대동계 가운데 특히 1663년에 작성된'좌목(座目)'을 비롯한 성책고문서 등 관련유물 47건을 지정문화재로 신청하려고 한다. 이렇듯 모든 것은 달빛에 바래면 야사(野史)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역사(歷史)가 된다고 한다.

개인이나 마을, 종가집의 뒤주에는 햇빛을 기다리는 문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역사도 아니고 야사도 못된 채 좀이 먹거나 화재 등 훼손될 소지도 많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2009년을 이와 같은 우리의 '역사유물 찾기의 해'로 정하고 적극 캠패인을 벌이려고 한다. 그것이 선조들이 남긴 업적과 가치를 길이 보존하는 것이 되고 후손들이 그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된다. 벌써 이인구(李麟求) 계룡건설 명예회장과 조선조 기호학파의 거유 윤증(尹拯) 선생 후손인 윤완식(尹完植) 씨도 유물을 기탁할 뜻을 밝혔다. 그렇게 해서 충청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것 아닐까. 충청인들의 적극적인 역사 참여를 기대할 뿐이다. 문의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041-856-8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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